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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아시스처럼 나타난 한국 닮은 풍경에 방긋

[겁쟁이 시골 아줌마의 좌충우돌 산티아고 순례길] 19편

박미희 webmaster@idomin.com 2016년 06월 21일 화요일

◇7월 5일 카스트로 헤리스에서 포블라시온 데 캄포스까지 27㎞

새벽 2시쯤 다시 깨어 뒤척이다 3시 좀 지나 짐을 챙겨 주방으로 갔어요. 벌써 준비하고 출발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아마 그들도 저처럼 잠을 못 이룬 것 같아요. 아침 요기를 하고 나와 마을 끝쯤에 가서 누가 지나가기를 기다렸어요. 혼자 출발하려니 아직 너무 이른 시간이라서 좀 그렇더라고요. 한참을 기다려도 아무도 오지를 않네요. 그래도 새벽이 되니 날은 시원해서 앉아 있기가 괜찮았어요. 저기 부지런한 한국젊은이들이 먼저 나타납니다.

아~! 달빛, 달빛이 아주 좋아요. 며칠째 새벽마다 달빛과 함께 걷는데 오늘은 더욱 느낌이 다르네요. 이 길을 걸으며 인상적인 풍경 중의 하나가 달빛과 함께 걷는 거예요. 달빛이 비치는 밀밭 사이로 걷는 느낌은 무어라 형언할 수 없답니다. 오늘은 그 감동이 더하는 날이에요.

오르막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오르다가 뒤를 돌아보니 불빛이 반짝이는 카스트로 헤리스가 평화롭게 느껴졌습니다. 낮에 보았더라면 어떤 느낌이었을까 궁금하기도 하네요. 이 오르막은 모스텔라레스 고개(Alto Mostelares)를 넘는 길입니다. 올라가면서 보니 멀리 어제 지나왔던 작은 동네들의 불빛이 여기저기 보입니다. 다 평원이라서 그런지 멀리까지도 불빛이 보이네요. 고개를 지나 내려가는데 반대편에도 멀리 불빛들이 보여요.

이젠 날도 밝기 시작했어요. 한참을 내려가니 샘이 나오네요. 잠깐 쉬면서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니 구불구불 밀밭 사이로 이어진 길에 순례자들이 하나씩 보이며 참 멋진 풍경이에요. 저도 저 멋진 풍경 중의 하나였겠지요? 오늘은 처음으로 구름이 끼었어요. 지금까지 너무나 쾌청한 날의 연속이었는데 모처럼 구름 낀 하늘이 반갑기도 하네요.

혼자서 큰소리로 노래를 따라 부르며 걷고 있는데 누가 오는 소리가 들려서 깜짝 놀라 뒤돌아보니 이탈리아 3인방(4일 전부터 길에서 자주 만나는 순례자들) 중 한 명이 빠른 걸음으로 따라온 거예요. 멀리서 제 옷을 보고 일부러 인사하려고 빨리 온 거죠. 다른 친구들은 걸음이 늦어 뒤에 따라오고 있답니다. 반갑게 인사 나누고 저는 다시 길을 걸었죠. 이탈리아 친구는 친구들과 함께 걸어야 하니까요.

그런데 오는 길에 아무리 찾아도 바르(bar)가 보이지를 않아요. 마을은 몇 개를 지났는데도요. 근 20㎞를 걸어와서야 커피와 요기를 할 수 있었어요. 메세타의 쓴맛을 보는 날이었죠. 그나마 날씨가 흐려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요? 아침식사를 안 하고 왔더라면 지쳐서 쓰러질 뻔했네요.

바르에서 그동안 마주쳤던 친구들과 만나 이야기도 나누며 넉넉히 쉰 다음 프로미스타(Fromista) 마을을 향해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제까지 걸었던 길과는 다른 풍경이 펼쳐집니다. 카스티야 운하(Canal de Castilla)를 따라 걷는 길인데 물길이 아주 잘 만들어져 있고 포플러가 길게 뻗어 있습니다. 무엇인지는 몰라도 누런 밀밭이 아닌 푸른 밭이 펼쳐져 있는 게 꼭 한국의 풍경 같기도 하고 무척 정겹게 느껴지는 그런 길이었어요.

프로미스타로 향하는 길에 만난 카스티야 운하.

이 길의 끝쯤에 프로미스타가 있었습니다. 원래 여기까지 걷기로 했었는데 알베르게는 별로라고 소문도 있고 해서 고민하다 좀 전에 길에서 만난 아저씨가 3.6㎞만 가면 포블라시온 마을이 나오는데 호텔에 딸린 알베르게가 있다고 안내문을 준 게 있어서 힘을 내 그곳까지 가기로 했습니다. 일단 배가 고프니 점심은 먹고 출발하려고요. 바르에 들어가 시원하게 맥주도 한 잔 하고 간단히 점심을 먹는데 프랭크 부자가 지나갑니다. 자기들은 여기서 묵어야 한대요. 프랭크가 무척 힘이 들어 보였어요.

이제 구름도 걷히고 땡볕은 작열하는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어요. 그깟 3.6㎞쯤이야! 거기다 저쪽에 마을이 보이니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고 시작했는데 그늘 하나 없는 한낮의 태양은 그야말로 이글이글! 직선으로 뻗은 4㎞도 안 되는 길이 천리같이 느껴졌어요.

고색창연한 포블라시온 건물들.

알베르게에 오니 상황이 별로네요. 저번처럼 호텔에 딸려 있는 알베르게라고 해서 기대를 했는데 오산이었어요. 이곳 알베르게는 너무 낡았어요. 그래도 어제의 알베르게보다는 양반이에요. 그리고 우선 조용해서 좋았어요. 모처럼 기분 좋게 낮잠을 자고 산책하러 나갔습니다.

다행히 어제보다 날씨도 훨씬 덜 덥네요. 일요일이라서 아예 저녁엔 순례자 메뉴를 먹으려고 했는데 마침 문을 연 바르 겸 조그만 슈퍼가 있어서 혼자지만 저녁을 해먹기로 했습니다. 마침 어제 남은 쌀이 있어서 가능한 거였지요.

알베르게로 오니 몰도바(유럽 동부 내륙에 있는 공화국)에서 왔다는 알렉스가 자기가 가져왔다는 차를 끓여 먹어 보라고 합니다. 맛이 괜찮았어요. 친구와 저녁 준비를 해서 먹는다더군요. 제가 한 밥과 감잣국, 스파게티와 샐러드로 함께 저녁을 먹기로 했습니다. 이런 자리에 와인이 빠질 수 없겠죠. 얼른 뛰어가서 와인을 사왔지요. 기분 좋아하더라고요. 말은 잘 통하지 않았지만 즐거운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알렉스는 감잣국이 맵다고 하면서도 더 먹기까지 하네요. 어찌하다 보니 이 영어 실력으로 우리나라 남과 북의 이야기까지 나누었다는 것은 참 웃긴 일 아니에요?

몰도바에서 온 알렉스와 함께하는 저녁식사.

식사 후 다시 산책하러 나갔는데 바람이 아주 좋았어요. 내일 어디로 가야 하는지 확인도 하고 성당도 둘러보았지요. 오늘은 잠자리에 일찍 들지 않았어요. 내일은 16㎞만 걸을 예정이고 낮잠도 푹 자서 피곤하지도 않았거든요. 알베르게 앞 벤치에서 음악도 듣고 해가 지기를 기다려 봤어요. 바람도 선선하게 불고 기분 좋은 저녁입니다.

몰도바에서 온 알렉스와 함께하는 저녁식사.

여태 늘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었기 때문에 그리고 알베르게가 오후 10시면 문을 닫기 때문에 온전히 해가 지는 것은 본 적이 없었거든요. 10시가 다 될 때까지 해가 있고 11시 20분에야 어둑해집니다. 이렇게 늦게까지 해가 있다는 게 신기했어요. 그제야 잠자리로 들어와 잠을 청하는데 사방이 정말 그야말로 쥐죽은 듯이 조용했습니다. /글·사진 박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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