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툰 목수 세상에서 살아남기] (4) 먼저 죽은 자가 이긴다

깊이 생각하기보다는 입으로 내뱉어 떠들기 좋아해 속이 공허하고, 기록을 남기기보다는 대충 제목만 생각해 두고 미루는 습관 탓에 어떤 일이든 한참 지나 뒷북치는 습관이 있습니다. 게다가 천성까지 게을러 더욱 더 그렇습니다. 오늘은 '서툰 목수 세상에서 살아남기' 주제에서 많이 벗어나 엉뚱한 얘기지만 5년 전쯤의 기억으로 뜬금없이 뒷북을 쳐보려 합니다.

◇영웅은 요절해서 전설로 부활한다 = 2011년 9월. 건강에 이상신호가 잡혔습니다. 늦더위가 여전하던 때였는데 사흘 연속으로 코피를 쏟아내다 마지막에는 경기장 한복판에서 펑하고 코피가 터지면서 병원으로 실려갔습니다. 과도한 음주와 흡연, 운동 부족, 업무상 스트레스 등등 늘 그렇듯 그저 그런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상태는 생각보다 심각했고 고혈압이 심각한 수치로 드러났습니다.

건강해야겠다고 살짝 긴장 타던 그 때 한국프로야구의 역대 최고 교타자 장효조 선수가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그리고 꼭 일주일 뒤 마찬가지로 전설적인 투수 최동원 선수 또한 대장암으로 그 뒤를 따라갔죠. 축구계에서 일하고 있었지만 야구에도 관심이 많았고, 두 선수는 초창기 프로야구 팬이라면 다들 기억하는 대단한 선수였죠. 여러 가지 의미로 아쉬운 마음이 컸습니다. 여기다 3주 뒤에는 전혀 다른 분야이기는 하지만 췌장암으로 투병하면서도 여전히 활동하던 IT계의 전설인 애플의 스티브 잡스도 마찬가지로.

5땡 잡스, 56년생 장효조, 58년 개띠 최동원이니, 50대 초~중반에 불과했죠. 단순 비교는 어렵지만 '사계의 최고' 세 사람이 거의 동시에 별이 됐습니다. 그때 문득 든 생각이 '영웅은 요절해서 전설로 다시 태어난다'였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애플 창업자, 개인용 컴퓨터 개발 보급, 아이팟, 아이폰 등등.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사람이죠? 먼저 떠났기 때문에 '혁신의 아이콘'이라는 그에 대한 수식어는 꽤 오래 사람들 기억 속에 남을 겁니다.

대한민국 최고의 타자로 손꼽히는, 1983년부터 10년 동안 프로야구 삼성과 롯데에서 활약한 장효조 선수는 통산 타율 0.331과 통산 출루율 0.427를 기록했습니다. 이는 30년이 넘는 한국 프로야구 최고의 기록으로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통산 타율 2위인 양준혁 선수의 0.316과 비교해도 차이가 큰 만큼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장효조가 치지 않는 투수의 공은 볼이다"라는 뛰어난 선구안에 대한 평가도 있군요. 그에 대한 수식어는 '타격의 달인'이었습니다.

다들 아시지만 최동원 선수는 또 어떨까요? 그냥 야구만 잘한, 대단한 투수라고 할 수 없는 선수입니다. 기록만으로 엄청나지만, 선수 생활 과정에서 보여준 그의 태도와 생각, 그리고 이어지는 행동 등 전체적으로 평가받아야 할 선수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프로야구 선수생활은 길지 않았습니다. 1982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출전 대표선수로 선발되는 바람에 장효조 선수와 마찬가지로 프로 데뷔가 한 해 늦은 1983년입니다. 통산 기록은 8시즌 동안 103승 74패 26세이브. 특히 눈에 띄는 부분은 전체 승리의 80%인 81게임을 혼자 던졌고, 한 점도 주지 않은 경기가 무려 15번. 요즘 투수로는 상상조차 불가능한 기록입니다. 특히 84년에는 정규 시즌에서 27승에다 한국시리즈 4승으로, 그 한 해 동안 무려 31승. 한국시리즈가 7전 4선승제인데, 시리즈 성적이 4승 1패. 롯데 자이언츠의 우승이 아니라 '최동원의 우승'이라고 해야 할 겁니다.

1980년대 프로야구 초창기를 개척한 '불세출의 투수' 고 최동원 선수는 2011년 지병으로 별이 됐다. 그의 나이 53세였다. 사진은 지난 1983년 서울 잠실구장에서 처음 열린 야간경기에서 최 선수가 역투하는 모습. /연합뉴스

◇신념을 갖춘 '상남자' 최동원 = 최동원 선수에 대해서는 달리 주목할 부분이 있습니다. 1988년 열악했던 프로야구 최저연봉제를 개선하는 내용을 기본으로, 선수들의 복지 증진과 권익 보호를 목적으로 한 프로야구선수협의회 결성을 직접 주도한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구단들의 반대로 결성이 무산된 뒤 트레이드 명목 아래 다른 팀으로 쫓겨납니다. 당시 최고 대우를 받는 최고 선수임에도, 구단과 불화에 따른 불이익이 뻔히 보이지만 전체 선수를 위한 반동적(?) 행동의 선두에 섭니다. 최동원 선수는 또 1980년대 초 정치 시위 군중 속에서 목격되기도 했고, 80년대 말 부산지역 언론노조 총파업에 무기명 후원금을 기탁했다고도 합니다.

은퇴한 최동원 선수는 91년 당시 3당 합당으로 만들어진 민주자유당 입당 제의를 거절한 채 합당에 반대해 만들어진 노무현 전 대통령의 '꼬마 민주당' 소속으로 YS 지역구인 부산 서구 시의원에 출마해 낙선하기도 합니다.

한국시리즈를 앞두고 말도 안되는 '4차례의 선발 등판'을 요구 받자 묵묵히 "한번 해보입시더"라며 실제 5차례 등판을 감행하고, 당선 가능성이 희박한 야당 공천으로 선거판에 뛰어든 그의 행동에서 야구 실력뿐이 아니라 사회적 정의감과 소명감을 갖춘 인물로 평가되는 대목입니다. 요즘 말로는 그야말로 '신념을 갖춘 상남자'라 할 수 있겠죠.

◇선동열은 먼저 간 최동원을 이길 수 없다 =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최고 성적의 투수는 단연 선동열 선숩니다. 한국프로리그 통산 146승 40패 132세이브. 통산 평균자책점 1.20. 비교가 불가능한 최곱니다. 앞으로도 깨지기 힘든 기록입니다. 비록 최동원 선수와의 맞대결에서는 1승 1무 1패로 승부를 가리지 못했지만.

이미 전성기를 넘어선 최동원 선수에 비해, 4살이 적어 전성기에 접어들었고 철저한 관리 아래 활약한 선동열 선수의 성적을 단순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선동열의 평가에서도 그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최동원 선배와 같은 거대한 목표가 있었기에 나는 더 노력했고 지금 자리에 설 수 있었다"고.

그가 떠난 지 삼 년 되던 지난 2014년 최동원기념사업회는 매년 최고의 활약을 한 국내 투수를 대상으로 '무쇠팔 최동원상'을 만들었습니다. 상이라는 것이 단지 기념비가 될만한 성적을 거뒀다는 이유만으로 만들어질 수 없지 않습니까? 적어도 선수로서의 업적은 물론이고 의미 있는 활동과 남긴 영향력, 인간성 등 입체적인 평가를 통해 만들어질 때 상의 권위가 인정될 겁니다.

이 상이 제정됨으로써 역대 최고 투수이기는 하지만 선동열 선수는 이제 최동원 선수를 넘어설 수가 없게 됐습니다. 성적으로 보면 언젠가 선동열 투수상이 생겨도 자연스럽겠지만 '죽은 최동원상'이 만들어진 이상 '살아있는 선동열상'이 만들어지기는 쉽지 않을 테니까요. 결국 먼저 떠난 최동원 선수가 4번째 대결에서 선동열 선수에게 부전승을 거둔 것은 아닐까요? 팬들의 기억 속에 오랫동안 기억이 될테니. /황원호(창동목공방 대표)

※이 기사는 경남도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주민참여사업 지원으로 이뤄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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