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가 자주 하시는 말씀이 있다. "우리 막내는 댓글 배워 말글 써먹는다"고. 맞는 말씀이다. 정말 어쭙잖게 배운 외국어를 너무 잘 써먹고 있다. 몇 년씩 영어학원에 다니면서 공을 들여도 써먹을 기회가 없거나, 어학연수까지 다녀와도 한국 친구들이랑 어울려 노느라 전화 한 통 제대로 못 받는 경우가 허다하다.

우리 대학 외국인 숙소에 15개국 40명 정도의 선생이 함께 산다. 영어와 중국어가 공용어다. 언어가 안 되면 사이가 어색하고 사는 게 불편하다. 물론 시간이 해결해 주기도 하지만 그때까지는 멀쩡하게 생겨서 바보짓을 해야 한다. 그래도 계속 들이대야지 피하면 영원한 이방인으로 남는다. 나도 명색이 4개 국어를 한다. 제대로 돈 주고 배운 글은 하나도 없다. 그래서 내가 쓰는 외국어 앞에는 '전투'란 수식어가 붙는다.

영어는 남들처럼 6년 동안 삼위일체를 열심히 팠지만 대학 시험 치고 나서 다 잊어버렸다. 그나마 잠시 필리핀에 나가있을 때 하루 두 시간씩 심심풀이로 한 프리 토킹이 영어 울렁증을 걷어내는 데 도움이 됐다. 이후 미국, 영국이 아닌 다른 동네서 온 외국인에게는 자신 있게 영어로 들이댄다. 어차피 모국어도 아닌데 문법 좀 틀리면 어떠랴.

일본어는 어릴 때부터 했다. 일본에 친척들이 살았는데 올 때마다 내 또래 아이들을 데리고 왔다. 같이 놀면서 편지도 하고 전화도 하다 보니 필요가 실력을 만들었다. 그 덕에 내 일본어는 대부분 반말이다. 관서지방 억양에 여성적 표현이 굳어져 아줌마들이랑 수다를 떠는 데 알맞다. 같은 층에 영어가 좀 서툰 일본 선생이 새로 왔는데 고장 난 곳만 있으면 찾아온다. 중국어로 고장 신고를 해 주고 커피 얻어 마시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런데 한자 좀 안다고 만만하게 본 중국어가 문제다. 직무능력 향상을 위한 방학 특강과 독학이 전부였지만 자신이 있었다. 읽기와 쓰기는 괜찮은데 가장 중요한 듣기와 말하기가 만리장성이다. 혼자 병음을 보고 익힌 발음이라 약간의 성조 차이에도 벽에 부딪힌다. 도리어 잘못 굳어진 성조를 고치느라 더 고생이다.

김경식.jpg
어쨌든 지금은 말글을 쓰고 있으니 노후에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해 볼까 한다. 전부터 해 보고 싶은 일이었고 홈스테이 경험도 많다. 마침 집도 바닷가에 있고 1층이 통째로 비어 있다. 향후 관광은 장기적인 문화 체험형으로 바뀔 것이다. 소수 인원을 대상으로 2주, 4주, 3개월 과정의 한국어 한국문화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제대로 된 한국을 알리고 싶다. 학기 중에는 또래 실버 부부들에게 한국의 정을 나누어 주고, 방학 중에는 외국 학생들의 한국어능력시험 준비를 도와주고 싶다. 글로벌 시대 인맥 관리는 우리나라 미래를 푸르게 할 나무를 심는 일이다. 좁은 우물 안에서 진흙탕 싸움 그만하고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야 한다. 댓글이든 단도든 손에 쥐어 준 대로 근거 없는 자신감만 앞세워 급변하는 세계와 맞서야 한다.

/김경식(시인·중국 하북외대 교수)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