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 바래길에서 사부작] (11) 바래길 외전 남해대교 지나 설천해안도로로 2부

남해대교를 지나면서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면 보이는, 남해 설천해안도로 두 번째 이야기다. 지난번 다녀갈 때는 썰물이더니 다시 오니 밀물이다. 많은 것이 물 속으로 사라졌다. 그래도 끝내 잠기지 않는 풍경의 끄트머리들이 있어 위안이 된다.

◇옛 사람들의 상상력, 대국산성 = 산을 오른다. 사라진 것들 너머 더 큰 풍경을 보기 위해서다. 남해군 설천면 대국산 정상에는 통일신라시대에 지었다는 대국산성이 있다. 큰 도로에서 산정상 부근까지 임도가 나 있다. 거리는 약 2㎞. 보존 상태가 좋아 학술적으로 중요한 자료라고 한다. 성은 현재 경남도 기념물 19호로 지정돼 있는데, 대국산 정상을 둘러싸고 주변 돌을 가져다가 가지런하게 쌓은 성이다. 성 자체도 장관이지만 무엇보다 성에 깃든 전설이 마음에 들었다.

전설은 두 가지다. 먼저 대국산 아래 비란마을에 살던 청이 형제 이야기가 있다. 우애가 좋았던 형제가 한 여인을 사랑하게 된다. 형제는 내기를 한다. 여인이 두루마리 한 벌을 만드는 동안 형은 30관(약 113㎏) 쇠줄을 메고 20리 길을 다녀오고, 동생은 대국산 정상에 돌 성을 쌓기로 한다. 결국, 동생이 내기에 이기고 형은 슬퍼하며 목숨을 끊고 말았다. 당시 마을에 왜구 침입이 잦았는데 동생이 쌓은 성을 이용해 마을을 지킬 수 있었다고 한다.

원형이 잘 보존된 대국산성. 통일신라시대에 지었다고 한다. 두 가지 재미있는 전설이 깃든 곳이다.

다른 하나는 천 장군과 일곱 시녀 이야기다. 조선시대 설천면을 지키던 천 장군이 있었는데, 하루는 시녀들과 내기를 했다. 시녀들이 저녁밥을 짓는 동안 성을 쌓아 보이겠다는 거였다. 천 장군이 대국산 정상에서 부채질을 한 번 하자 바닷속에서 바위들이 날아와 순식간에 성이 생겼다고 한다.

전설은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하지만, 내부에서 출토된 유물은 이 성이 최소한 통일신라시대에 지은 것을 알려준다. 옛 사람들은 어떻게 산 정상에 이렇게 튼튼한 성을 쌓았는지 궁금했을 테다. 과학 역사 지식이 없던 그들은 사랑의 기적이나 신통력 같은 상상을 했을 것이고 이것이 그대로 전설이 된 것이 아닐까.

◇호수 같은 강진만과 매력적인 강진교 = 다시 설천 바닷가 도로를 따른다. 지난번 마을 주민들이 갯벌에서 바지락을 캐던 수원늘을 지나면 왕지마을이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남해 금산에서 백일 기도를 하고서 조선을 건국했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졌다. 백일 기도를 마친 이성계는 지금 설천면 수원늘에서 나룻배를 타고 바다를 건넜다. 그때 잠시 쉬어 간 곳이 왕지마을이다. 옛날에는 왕제(枉齊)라 했다. 이성계가 이곳에서 바다를 보니 마치 호수같이 잔잔하면서도 광채가 나고 기운이 돌아 이곳에 장차 큰 인물이 날 것이라며 감탄했다고 한다. 후에 이성계가 조선 임금이 되었으므로 마을 이름을 왕성할 왕(旺), 못 지(池)라 했다고 기록은 전한다. 남해 설천, 고현, 창선면 사이 바다를 강진만으로 부른다. 북쪽으로는 하동과 사천이 지척이다. 이렇게 육지로 사방이 둘러싸여 강진만은 거대하고 잔잔한 호수 같다. 왕지마을 해변에 서면 이성계가 본 강진만이 어떠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왕지마을을 지나 작은 언덕길을 내려가면 넓은 갯벌이 나온다. 길은 갯벌을 왼편으로 끼고 가다가 다리를 하나 만난다. 강진교다. 강진교는 바다를 가로지르는 다리가 아니다. 북쪽으로 툭 튀어나온 지형을 따라 엎어놓은 'U'자 형으로 바닷가를 에두른다. 대부분 다리가 '직선의 욕망'을 따라 지어진 것을 생각한다면 강진교는 곡선을 지향한 그 의도만으로 충분히 매력적이다.

왕지마을을 지나면 만나는 강진교. 바다를 가로지르는 다리가 아니다. 'U'자 형으로 바닷가를 에두른다.

◇조가비 더미와 신비의 바닷길 = 설천면 바닷가에서는 하얀 조가비가 가득 쌓인 모습을 자주 만난다. 조가비들은 튼튼한 줄에 단단히 꿰어져 있다. 주민들에게 물으니 굴 양식할 때 쓰는 것이라 한다. 굴 종패(씨가 되는 굴)를 조가비에 붙여 갯벌 얕은 물에 매달아 조금 키운 다음 깊은 물로 옮긴다. 유달리 갯벌이 많은 설천면 바닷가는 남해섬 대표적인 굴 양식지다. 강진만에 풍부한 플랑크톤은 굴을 양식하기에 좋은 조건이기도 하다. 설천면 해안가는 조수 차가 제법 커서 썰물 때는 갯벌 바닥이 다 드러나지만 밀물이 되면 제법 높은 양식시설이 모두 물에 잠긴다. 이렇게 바닷물 속과 밖을 오가며 굴 종패가 단련되는 셈이다.

굴 양식을 많이 하는 곳이 왕지마을 다음에 만나는 동흥마을과 봉우마을이다. 두 마을 모두 이전 문의마을에서 갈라져 나왔다. 문의, 동흥, 봉우마을은 오래전 학문을 하는 이들이 많아 선비 마을로 불렸다. 또 말을 많이 키워 '마판'이라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 지금은 굴 양식으로 제법 소득이 많은 편이다. 마을 해안을 따라 갯벌이 많은 까닭에 바닷가 등성이마다 보여주는 경치가 일색이다.

옥동마을 앞 도래섬(맨 왼쪽)과 그 뒤로 보이는 문항마을 상장도·하장도. 썰물이 되면 걸어서 갈 수 있다.

다음에 만나는 옥동마을과 문항마을에서는 강진만의 큰 조수 차가 만든 기적을 볼 수 있다. 옥동마을 앞에는 아담한 도래섬이 있다. 썰물이 되면 마을에서 걸어서 이 섬에 들어갈 수 있다. 도래섬 바로 옆으로 문항마을에 속한 상장도, 하장도가 보인다. 형제처럼 나란히 붙은 이 섬은 이른바 '모세의 기적'으로 유명하다. 역시 썰물이 되면 마을에서 상장도 사이, 또 상장도에서 하장도 사이에 제법 긴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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