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시하려 해도 불쑥불쑥 떠올라

열두 살, 140㎝ 남짓한 조그만 여자아이에게 무자비한 폭력이 날아들었다. 책상에 물을 부어버리고 옷을 짓밟는 것은 물론, 뒷자리에서 우산으로 등을 세게 찌르고, 철판으로 머리를 내려치는 짓까지. "야, 눈 안 깔아?" 그럴수록 더 눈을 부릅떴다. 눈이라도 깔아버리면 지는 것만 같아서. 여자아이는 유일한 혼자만의 공간인 화장실에서 실내화 아래 숨겨뒀던 종이를 꺼내 괴롭힘 당한 그날의 일기를 적었다.

내 일기의 내용이 알려지자 학교는 한바탕 난리가 났다. 학교에선 선생님들이 바삐 회의했다. 결정적으로 나의 부모님은 우리 애 잘못이 아니라며 학교를 뒤집었다. 가해 학생들은 각서를 썼고, 일주일간 격리 조치됐으며 이후 내게 와서 사과했다. 나는 사과를 받았지만, 마음속으론 받아들이지 못했다. 너희가 괴롭힌 게 얼만데, '미안하다' 한마디로 용서가 되겠니.

올해 초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내놓은 아동의 학교폭력 경험 실태에 따르면 우리나라 9∼17세 아동 3명 중 1명이 학교폭력 피해 경험이 있으며, 5명 중 1명은 가해 경험이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또한, 지난해 교육부가 발표한 학교폭력실태조사에서 학교폭력을 당한 장소로는 학교 밖이 24.5%인 반면 학교 안이 75.3%로 가장 많아 학교 안 피해 실태가 상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전보다 학교폭력이 감소하는 추세라는 통계도 있었지만, 감소해도 이렇게나 많은 학생이 피해를 입고 있다는 것이 절망스럽다.

'가해 학생은 소년법으로 보호하고, 피해 학생은 어느 법으로 보호합니까.' 한 피해학생 부모가 탄원서에 쓴 글이다. 피해 학생들은 공통적으로 '가해 학생들과 같은 학교에 계속 다녀야 한다는 게 두렵다'고 말한다. 가해 학생의 처벌은 기껏해야 교내봉사나 정학 며칠이다. 학교에서 쉬쉬하기도 하고, 학교 폭력이라는 것이 피해 학생이 아무리 괴로워도 증거를 남기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가해 학생들은 처벌 기간이 끝나면 아무렇지 않게 학교를 다닌다. 하지만 피해 학생의 정신적 충격은 누가 보상해주나.

얼마 전 KBS에서 방영된 드라마 <백희가 돌아왔다>에서는 배우 진지희가 일진을 때려눕히는 장면이 나왔다. 드라마 기사에는 '속이 시원하다.', '멋있다'는 댓글이 주를 이뤘다. 하지만 동시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속이 시원하다는 말도, 멋있다는 말도 자신에게 가까운 일일수록 공감할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많은 학생이 저런 학교폭력 가해학생들을 가까이서 접했고, 제대로 대응하기 힘들어했다는 뜻이다.

세상은 언제쯤 변할 수 있을까. 나는 내가 가진 10년 전 기억이 지금은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랐다. 몇 년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대구 고교생 투신자살 사건'도 지금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오랜만에 '학교 폭력'을 검색하자 무수히 많은 사건 기사가 떴다. 어떤 기사에는 학교 폭력 근절을 위해 전담 멘토링 프로그램을 만들었다고 하지만, 어떤 기사에서는 이 프로그램이 잘 이행되지 않고 있다는 문제도 제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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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폭력은 제도를 강화하지 않으면 막을 수 없다. 아무리 예방을 한다고 외쳐봤자 가해학생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국가에서는 학교폭력 제도를 크게 강화할 필요가 있다. 지금처럼 '가해 학생 정학 5일' 정도의 허술한 처벌로 가해 학생들은 결코 반성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이런 가벼운 처벌은 가해학생들이 저지른 폭력이 큰일이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내 실내화 속에 눈물 자국과 함께 꼬깃꼬깃 접혀 들어갔던 그날의 종이는 아직도 발밑에서 가끔 바스락거린다. 애써 무시하려 해도, 다 잊은 듯해도 그 감촉은 불쑥불쑥 나를 찾아온다. 나는 이 종이를 언제쯤 꺼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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