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쟁이 시골 아줌마의 좌충우돌 산티아고 순례길 18편

◇7월 4일 오르니요스 델 카미노에서 카스트로헤리스까지 19.7㎞

이상하게 새벽에 잠이 자꾸 깨입니다. 새벽 4시, 벌써 누가 움직이는 소리가 나서 나도 짐을 챙겨들고 주방으로 내려왔죠. 한국 젊은이들입니다. 같이 아침식사를 하고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같이 조금 걷다가 혼자 걷고 싶어서 일부러 헤어져 걷습니다. 컨디션이 좋습니다. 희한하게도 잠을 그렇게 자지 못하는데도 걷기 시작만 하면 씩씩해져요. 이어폰에서는 이문세의 '행복한 사람'이 흘러나오니 발걸음이 가볍습니다. 새벽길을 걸으며 정말 숱하게도 들은 곡입니다. 이문세, 아바, 존 덴버는 혼자 걸을 때 동반자가 되어준 고마운 친구들이죠.

저 멀리 어둠 속에 세로로 길게 지그재그로 신비로운 불빛이 보여요. 이 광야에 아파트도 아니고 높은 곳에 양쪽으로 깜박거리는 것이 무슨 불빛인지 궁금해하며 걷는데 알고 보니 그것은 풍력발전기의 불빛이었어요. 수없이 많은 발전기가 깜박거리며 세워져 있는 모습이었던 거죠. 이곳에서 많은 풍력발전기를 보았지만 어둠 속에 있는 것은 처음 보았거든요.

양쪽으로 끝없이 펼쳐진 새벽의 밀밭은 그냥 평화입니다. 고요와 적막, 파란 하늘, 가벼운 바람, 맑은 공기 정말 이런 기분에 이 길을 걷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저 밑으로 온타나스가 보입니다. 작고 아름다운 마을이네요. 원래는 어제 여기까지 걸으려 했던 곳인데 부르고스까지 걸은 충격이 너무 커서 전 마을에서 묵었던 건데 아마 어제 여기까지 땡볕에 걸었더라면 너무 힘들었을 것도 같았습니다.

온타나스에 들어오자마자 바르(bar)가 있어 들어갔는데 어찌나 친절한 분들인지요.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웃음 가득히 맞아줍니다. 새벽공기를 가르고 도착한 순례자도 더욱 기분이 좋아집니다. 크루아상과 커피를 마시고 일어났는데 아쉬웠어요. 알베르게도 겸하고 있었는데 다음에 걷게 되면 이 친절한 알베르게에 묵어야지 하고 마음먹으며 나오는데 자전거를 타고 순례하는 가족이 지나갑니다. 엄마와 아들, 딸 그리고 아빠는 막내를 뒤에 태우고 갑니다. 가족끼리 자전거로 순례하는 것을 자주 보아 왔는데 볼 때마다 부럽고 아이들을 건강하고 강인하게 키우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답니다.

메세타 지역의 아침.

메세타에는 별로 없다는 가로수 길을 따라 〈순례자〉를 쓴 파울로 코엘료가 좋아했다는 카스트로헤리스(castrojeris)에 도착했어요. 겨우 오전 10시 반, 일단 초입 바르에서 잠깐 쉬고 추천 알베르게를 찾아가니 3시에 문을 연다고 합니다(ㅜㅜ). 하는 수 없이 공립 알베르게로 갔는데 상황은 최악입니다. 날씨도 더운데 지저분하기도 하고 침대 2층인데다 옆에 아저씨와는 딱 붙어 있고, '에구~! 다음 마을까지 갈 걸 그랬나? 그냥 3시까지 기다릴걸' 하는 후회도 되었지만 이것도 제가 넘어야 할 산,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한국인 젊은이들도 여기로 들어옵니다.

파울로 코엘료가 사랑했다는 카스트로헤리스 거리의 담벼락.
메세타에서 만난 한국인 순례자와 함께 휴식 중인 박미희(오른쪽) 씨.

◇형편없는 숙소도 이제 기꺼이 받아들이다

날씨가 하도 더워 알베르게에 있기가 힘이 듭니다. 동네 바르에 가서 맥주도 한잔 마시고 요기도 했습니다. 바르 앞 그늘이 좀 시원해서 일기도 쓰고 음악도 듣고 있는데 어제 만났던 한국학생이 옵니다. 일단 우리 알베르게는 이미 찼으니(그 열악한 조건에도) 다른 알베르게로 얼른 가서 배낭 갖다 놓고 오라고 했더니 그러고 왔더라고요. 둘이 한참을 이야기 나누다가 헤어졌어요. 낮잠을 자려 해도 너무 더워서 안 되겠고 산책하러 나가려고 해도 엄두가 안 나고 다시 바르 앞으로 갔어요. 음료수 하나 시켜놓고 앉아 일기도 쓰고 음악도 들었지만 정말 무료하더라고요.

그래서 더위를 무릅쓰고 산책하러 나갔어요. 마을이 길쭉하게 이어져 있었고 제법 사람들도 눈에 많이 띄네요. 학생들도 보이고 노인들도 보이고 나름 작지만 활기있는 동네같이 느껴졌답니다. 코엘료가 이곳을 왜 좋아하게 되었을까 하고 궁금하기는 한데, 그리고 이 마을을 제대로 보려면 저 산 위 성곽 부서져 있는 곳까지 가봐야 하는데 언감생심, 오늘은 그러기엔 날씨가 너무 협조를 안 해 주네요. 그늘을 찾으며 그냥 동네만 한 바퀴 돌고 돌아왔습니다.

카스트로헤리스를 내려다보는 산 위의 고대 성.

무엇을 먹어 볼까 하고 이것저것 생각해 봐도 이 더위에 식욕조차도 멀리 달아나 버렸나 봐요. 슈퍼에 가서 둘러보는데 밥같이 생긴 것을 팔더라고요. 가지고 와서 뜯어보니 풀풀 날리는 밥이라서 그냥은 도저히 못 먹겠어요. 그래서 라면수프에 감자 하나 넣고 밥을 넣고 푹 끓여 먹으니 그런대로 먹을 만했어요. 날씨는 더운데 뜨거운 국물이 부담스럽긴 해도 입맛이 살짝 돌아왔어요. 먹고 나니 이제 알베르게 앞도 그늘이 되기 시작했어요.

잠시 후 어떤 여자 순례자가 야단이 났습니다. 베드버그(빈대의 일종)에 물렸다는 거예요. 베드버그! 순례길에서 가장 공포를 주는 놈이에요. 이 벌레에 물리면 온몸이 가렵고 심지어는 걷는 것을 포기해야 하는 경우까지 생기기 때문에 알베르게 갈 때마다 걱정이었어요. 결국 이 알베르게에서 처음 보게 된 거지요. 호스피탈레로에게 보여주니 모기에게 물렸다며 딱 잘라 말하더라고요. 하지만 사람들은 눈짓으로 베드버그라고 말하고 있었죠. 베드버그 있는 알베르게라고 소문이 나면 문을 닫을 수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물린 사람은 나가서 스프레이약을 사오더니 배낭이랑 소지품을 큰 비닐봉지에 넣고 스프레이를 한통 다 뿌리고 있었어요.

카스트로헤리스 마을 거리의 조형물.

저도 한국 친구들에게 약을 받아 침대 주변에도 뿌리고 배낭에도 뿌리고 했는데도 불안감은 없어지지 않네요. 다행히 베드버그는 저를 물지 않았어요. 휴~! 날씨는 왜 이리 더운지 잠을 자려 해도 잠을 이룰 수가 없어요. 밤 9시인데도 아직 해가 있어요. 슈퍼에 가서 시원한 물을 한 병 사와서 끌어안고 안대, 귀마개를 하고 잠이 조금 들었는데 좀 잤다고 생각하고 눈을 떠보니 밤 11시 반, 애고! 아직도 밖이 다 어두워지지도 않았어요! /글·사진 박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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