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판, 전설의 고향

바다에 난데없이 쫓고 쫓기는 각축전이 벌어졌다. 커다란 개구리 한 마리가 난바다에서 거제 북쪽을 돌아 뭍을 향해 죽자 하고 펄떡펄떡 뛰어 도망을 친다. 그 뒤로 만 발이나 되는 이무기가 개구리를 잡아먹으려고 쫓는데 아가리에 들듯 말듯 헛입질이 간당간당한다. 바다에서 개구리나 뱀이 어떻게 살 수 있냐고 따지지 말자. 어차피 옛날 이바구니까.

이들이 유호마을 앞바다에 다다랐을 때 기어코 이무기가 개구리를 덮쳤겄다. 똬리를 틀어 옴짝달싹 못 하게 휘감고는 시뻘건 아가리를 쩍 벌리고 한입에 삼키려 드는구나. 이때 옆에 있던 학섬이 지진이라도 난 듯 들썩이더니 산만한 멧돼지로 변해서 이무기에게 달려든다. 허공으로 치솟아 들이받고 바다를 뒤집어 휘감으니 물안개 자욱하여 싸우는 괴성만 천지에 가득하다. 한나절이나 우르릉 쿵쾅거리더니 뭔가 허공에서 툭 떨어진다. 멧돼지로 변한 학섬 덕에 살아는 났다만 싸움 통에 혼이 나간 개구리다. 그대로 바다에 엎어져 섬이 된다. 망와도(亡蛙島)다. 조용해진 바다에 안개가 걷히니 멧돼지가 이무기의 목을 물고 제자리로 내려앉아 도로 섬이 된다. 사근도(蛇筋島)와 저도(猪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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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덕이 학의 머리 대금산줄기가 화살의 형국이라 한다. / 박보근 노동자

저도. 아쉽지만 이 섬은 민간인이 들어갈 수 없다. 대한제국 시절부터 군사적 요충지로 부상하면서 러시아와 일본의 각축장이 되었고 현재까지도 국방부 소유로 해군통제부에서 관리하고 있다. 인근 어민들에게는 어업권 제약으로 그리 달갑지 않은 존재다. 거기다 한 술 더 떠 이승만 대통령 때부터 대통령 별장으로 사용되면서 인근 유호리 주민들은 많은 불편을 감수해야 했다. 지금은 거가대교가 섬을 관통하고 진입로도 있으나 일반 차량은 접근할 수 없다 한다.

저들만의 저도의 추억은 지척에 두고도 바라만 보는 섬을 만들었다.

바라만 보다 또 한 구비 돌아드니 시원하게 뻗은 까만 몽돌 해변에 파도가 재잘거린다. 새알만 한 둥근 돌이 몸 부비는 소리는 파도 세기에 따라서도 다르고 들이닥치거나 빠져나가는 물결에도 소리를 달리한다. 구르며 오랜 이야기들을 새긴 돌들이 저마다 촤르르르 쏟아낸다.

거제 몽돌 해변 하면 동부면 학동이 많이 알려져 있지만 가장 긴 몽돌 해변은 이 농소 몽돌밭이다. 무려 2km에 달하는 이 해변은 학동에 비해 몽돌의 크기가 작고 수심이 얕다. 갯마을에서는 뱃일 나간 남정네들이 돌아오지 못 하는 안타까운 경우가 종종 있기에 혼자된 아낙들이 많기도 하다만 이 농소마을에는 유독 혼자 된 할머니가 많이 사신다. 1972년 이 마을 뱃사람 열넷이 쌍끌이 어선 오대양호를 타고 서해안으로 홍어잡이를 나섰다가 조업을 마치고 귀항한다는 무전을 끝으로 실종되는 사고가 났다. 애초에 풍랑이 거세고 눈까지 내려 침몰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북한 경비정에 나포되어 북한으로 끌려간 사고였다. 몇 해 전 고현시장 난전에서 홍합 몇천 원어치 사면서 들은 이야기를 졸시에 얹어 고현편에서 읊었었다.

농소에서 새벽 첫 차로

홍합 이고 나온 감포댁(관포)

스물일곱 뱃일 갔다

북으로 잡혀 간 생이별 서방님은

여즉도 스물일곱인데

오십이 다 된 큰아들이

시아버지 같다 그러고

오른쪽으로 진달래로 유명한 대금산을 끼고 가다 태풍 '매미'로 유실되는 자신의 토지를 지키고자 시작한 일이 13년째 혼자 힘으로 쌓고 있다는 북항마을의 '매미성'을 지나면 가파른 바닷가에 제법 큰 어촌 마을이 있다. 이름도 요상한 '시방'. 마을의 휘어진 해안선과 대금산에서 내리뻗은 갈바산의 형상이 활시위를 당기고 있는 모습과 흡사하여 원래 '살방'이라 하던 이름을 한자 말로 옮겨 쓰면서 '시방(矢方)'이 되었단다. 월간 <한국시>로 등단한 시인인 김봉기(67) 이장의 안내로 전설 같지만 약 백여 년 전 선대 어른들이 직접 겪은 옛이야기를 찾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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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방마을. / 박보근 노동자

시방마을에서 빤히 건너다보이는 섬 이수도. 이곳도 원래 학섬이라 불리었던 섬이다. 그 형상이 두루미가 물고기를 물고 있는듯하기도 하고 알을 품고 누운 모습 같기도 하다. 섬 속의 작은 섬이지만 물이 좋고 풍부하여 정작 본섬의 시방에도 없는 논에 벼농사도 꽤 짓는다. 날이 가물어 물이 부족하면 인근 시방, 흥남, 북항, 대금에서 물을 구하러 배를 타고 오기도 했단다. 섬 주위 어장에서는 대구와 멸치 등 수자원이 풍부하여 두루미 모양이라 학섬이라 불리던 이름을 이수도(利水島)라 하였다. 이렇게 모든 것이 풍족한 섬인데도 어찌된 영문인지 마을이 흥하지 못하고 우환이 끊이지 않았단다. 뱃일 나간 사람들이 풍랑에 상하고 해적들이 날뛰어 하루도 편할 날이 없는 섬이었다. 반면 건너 마을 시방은 논 한 뙈기 없고 바다 물건이래야 해초나 뜯고 조개나 줍는 형편인데도 골목 강아지가 지전을 물고 다니고 걸출한 인물이 나서 동네가 번성하여 갯일하며 부르는 '살방깨발소리'의 흥겨운 가락이 끊이지 않았다.

그리 살던 어느 날 금강 봉래산 사는 도인이 거제도 대금산 진달래 꽃구경을 나왔겄다. 산 위에서 두견새 핏빛으로 물든 산록을 굽어보던 도인의 눈이 이수도에 이르러 한참을 머무르더니 산을 내려와 배를 타고 섬을 찾았다. 전설의 고향에서 익숙하게 들었던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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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닷물 너머 이수도가 보인다. / 박보근 노동자

"어허~ 안타까운지고. 학의 날갯죽지가 꺾였구나."

장탄식을 하니 단박 온 섬사람들이 모여든다.

"이 양반이 안 그래도 송신스럽은 동네 와서 먼 귀신 씨나락 까묵는 소리고?"

젊은이 불뚝 대꾸를 마을 노장이 손사래로 물리고 공손히 묻는다.

"도사님 무슨 연유로 마을이 곤궁한지 알아듣게 일러 주십시오."

"저 대금산에서 흥남과 시방 사이로 쭉 뻗어 내린 갈바산이 화살의 형국이요 시방마을 휘어진 해변은 활의 당겨진 시위와 흡사하오. 자 저 팽팽히 당겨진 활시위가 어디를 고누고 있소이까? 바로 이 섬의 학 머리를 고누고 있지 않소. 이러니 어찌 학섬이 옴짝 달싹이나 하겠냐 말이오."

"아이고~ 도사님 아니 신선님 우리 마을 좀 살려주시옵소서. 조상 대대로 이리 억눌려 살아왔나이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나 그러면 건너 시방이 다칠 것이니…."

머뭇거리는 도인에게 온 섬사람들이 매달려 애원하니 다짐을 둔다.

"내 처방을 알려드릴 터이나 이로 인해 마을 간에 불화가 일어나거든 봉래산으로 날 찾아오시오."

마을 사람들은 도인의 말을 쫓아 이수도 정상 가까이 시방을 향해 '방시순석(防矢盾石)'이라 새긴 큰 비석을 세웠다. 학 머리를 향해 날아오는 화살을 막는 방패란 뜻이다. 한편 넉넉한 마을이었지만 황금 어장에다 좋은 물과 전답을 지닌 이수도를 은근히 부러워하던 시방은 어느 날부턴가 마을이 갑자기 쇠락해진다. 연유를 알아보니 '방시순석' 때문이라 태초에 생겨난 풍수를 억지로 인간이 바꿀 수는 없다며 철거를 요구하지만 이수도가 들어줄 리 만무했다.

방책을 궁리하던 차 지나던 스님이 한마디 툭 흘리고 간다.

"하나의 화살로 안 되면 퍼부으면 될 것 아닌가."

옳다구나 그렇구나 마을 옆에다 이수도를 향해 '방시만노석(放矢萬弩石)'이라 새긴 비석을 세웠다. 만 개의 쇠뇌를 퍼붓는다는 뜻이니 다시 이수도가 궁핍해진다. 이렇게 되자 두 마을은 앙숙이 되어 비석을 지키려 젊은이들이 야경을 서고 왕래가 끊겨 으르렁거린다. 옛 도인의 말을 떠올린 이수도에서 금강산에 사람을 보내 대책을 물으니 대뜸 호통부터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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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시순석(放矢盾石) 위에 덧세워진 방시만노순석(放矢萬弩盾石). / 박보근 노동자

"저만 살자고 그리 큰 방패를 세웠으니 어찌 사달이 나지 않겠느냐? 더불어 살자면 너희들도 화살 몇 대쯤 맞아야지."

'방시만노순석(放矢萬弩盾石)'이라 새긴 비석을 세우되 더불어 살 정도의 방패를 만들어라 한다. 이에 방시순석 위에 화강암을 깎아 방시만노순석을 덧세웠다. 그 크기를 방시만노석에 비해 매우 작게 하였더니 흥망이 어느 한 마을에 치우치지 않고 오늘까지 의좋게 잘살아 온다는 그런 전설 같은 이야기다.

인물이 난다는 대금 북쪽 외포에 들렀다. 공과를 떠나 변방이요 유배지로 홀대받던 곳에서 대한민국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이 난 곳이다. 이곳에서만 맛볼 수 있다는 '약대구떡국'을 주문했더니 제철이 아니란다. 동행한 아내는 식당 아주머니께 요리법을 받아 적고 나는 약대구 두 마리를 샀다. 대신 멸치요리에 막걸리 한 사발 곁들이고 옥포로 길을 잡는다.

굴까로 가세 굴까로 가세 연두야 새섬에 굴까로 가세

남산봉에 애기 죽순은 오동숲으로 넘나든다.

떴다 보아라 저 기러기 갈대 한 쌍 입에 물고

님의 방으로 기웃거린다.

물래야 댕기 꼬시랑 머리 니 언제 커서 내사랑 될래

타박타박 타박머리 니 언제 커서 내낭군 될래

각시야 자자 각시야 자자 삼던 삼가래 제쳐놓고

신랑아 자자 신랑아 자자 보던 책장 덮어두고

물길러 가세 물길러 가세 살방 둥천에 물길러 가세

물을 길러 둥천에 놓고 건너산 보고 한숨만 지네

새미가 좋아 물길러 왔나 낭군이 그리워 물길러 왔지

굴도 까고 임도 보고 겸사수사로 굴까로 가세.

-살방깨발소리 일부(장목면지.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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