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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달리는 노량 그 물결과 나란히 걸었네

[남해 바래길에서 사부작] (10) 바래길 외전-남해대교 지나 설천해안도로로 1편

이서후 기자 who@idomin.com 2016년 05월 27일 금요일

남해바래길을 4코스까지 걷고 나니 문득 정해진 길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선택한 코스가 설천해안도로다. 하동에서 남해대교를 지나면 보통은 19번 국도를 타고 남해읍 쪽으로 향한다. 대신 좌회전해 설천면 바닷가를 따라 에도는 길이 설천해안도로다. 이 도로도 완전히 바다와 붙어 있지는 않다. 바닷가를 따라 마을과 마을을 연결하는 도로들이 또 있다. 이 길을 따르면 오른편으로는 완만한 경사의 다랑논이, 왼편으로는 굽이굽이 갯벌이 펼쳐진다.

◇남해대교와 노량

하동군 금남면 노량리에서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를 본다. 매번 남해섬을 다니면서 한 번은 이렇게 건너다보고 싶었다. 붉은 기둥의 남해대교가 우뚝하다. 다리는 하동 금남면 노량 나루터와 남해 설천면 노량 나루터를 이었다. 이곳은 조선시대부터 노량으로 불렸다. 노량 앞바다는 물살이 거칠다. 거친 바다에서 이슬방울 같은 작은 배가 다리 노릇을 한다고 이슬 노(露), 다리 량(梁) 자를 써 노량이라 했다. 이는 남해섬으로 귀향하는 선비들이 지은 것으로 보인다.

노량 바다. 수심이 깊고 물살이 세다.

남해대교 건설은 남해섬으로선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이 다리로 남해가 처음으로 육지와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남해대교는 일본에서 차관을 들여 지은 것이라 한다. 이승만 정부에서 공보실장(지금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지내고 남해를 지역구로 5선 국회의원을 지낸 금암 최치환 선생이 다리 건설에 큰 역할을 했다고 기록은 전한다.

남해대교는 1968년 공사를 시작해 1973년 준공했다. 길이는 660m, 6000t의 하중을 버틸 수 있다고 한다. 당시에는 동양 최초, 최장 현수교여서 관심을 많이 받았다. 설계와 시공을 모두 현대건설에서 했다. 수심이 깊고 물살이 빨라 다리를 놓기가 쉽지는 않았다고 한다. 현재 남해군 설천면 덕신마을에서 하동군 금남면 노량리를 잇는 제2남해대교가 건설되고 있다.

하동 노량에서 바라본 남해 노량과 남해대교. 다리를 건너 왼쪽으로 돌면 설천해안도로로 이어진다.

남해대교를 지나 노량삼거리에서 좌회전하면 노량마을로 들어간다. 설천해안도로가 시작되는 것이다. 노량마을은 남해바래길 13코스 이순신 호국길의 시작점이다. 이순신과 노량마을은 13코스를 걸을 때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자암 김구 적려유허비와 화전별곡

노량마을에서 우연히 자암 김구(1488~1534)를 만났다. 이순신 장군을 모신 충렬사 입구에 서 있는 키 큰 비석에 자암김선생적려유허비(自菴金先生謫廬遺墟碑)라고 적혀 있었다. 자암 김선생이 유배 와서 살던 오두막터란 뜻이다. 자암은 조선 중종 시기 대표적인 학자다. 특히 중종이 그를 친구처럼 아낀 것으로 기록은 전한다. 하지만, 자암은 기묘사화(1519)로 남해에서 10년간 유배생활을 했다.

노량마을에서 만난 자암 김구 적려유허비.

자암은 서포 김만중과 함께 남해 유배문학을 대표하는 이다. 그는 남해 유배생활을 하면서도 지역 문인들과 교류하고 학문에 힘썼다. 그가 남해에서 지은 것이 화전별곡(花田別曲)이란 경기체가다. "산천은 기이하게도 빼어나 유생, 호걸, 준사들이 모여들매 인물들이 번성하느니 아, 하늘의 남쪽 경치 좋고 이름난 곳의 광경, 그 경치 어떠한가."(화전별곡 1장 일부)

화전은 자암이 남해를 부르는 별칭이다. 그만큼 그는 남해의 아름다운 풍광을 사랑했다. 남해바래길 5코스 화전별곡길은 바로 자암 김구의 화전별곡에서 이름을 가져다 쓴 것이다.

비석은 남해에서 보는 다른 비석보다 월등히 컸다. 자료를 보니 높이가 2m, 너비가 90㎝다. 비석 뒤편 비문에는 이 비석을 세운 내력과 자암의 유배 생활을 한자로 적어 놓았다. "아, 이곳은 나의 선조 자암 선생께서 귀양살이하시던 고을이다. 선생의 6대손인 내가 이 고을에 수령으로 와서 처음으로 선생의 유지를 찾았다. (후략)" 안내판에는 자암의 6대손 김만화가 숙종 때 남해현령으로 와서 세웠다고 적혀 있다.

◇수원늘마을

노량에서 바닷가를 따라가다 보면 아담한 등대가 나온다. 지도를 보니 수원늘등대라고 되어 있다. 등대 주변 바위에서 노량 바다를 아주 가까이서 볼 수 있다. 가까운 곳은 마치 계곡물처럼 흐름이 선명하다. 저 먼 곳은 물살이 거대하게 소용돌이친다. 노량을 건너는 것이 육지를 향하는 유일한 뱃길이었을 텐데, 저 거친 물살이 주는 두려움이 남해섬을 더욱 섬으로 만들었을 것 같다.

수원늘마을 앞 갯벌에서 바지락을 캐는 주민들.

등대에서 시작해 마을까지 해안은 온통 낚시꾼들이다. 이 근처가 낚시터로 유명한 듯하다. 낚시꾼들을 지나치면 조그만 방파제가 있는 마을이 나온다. 버스 정류장을 보니 수원늘이라고 적혀 있다. 그래서 등대 이름도 수원늘이었던 거다. 자료를 보니 조선 태조 이성계가 남해 금산에서 조선 건국을 기원하는 백일기도를 마치고 이곳 수원늘에서 나룻배를 타고 하동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마을로 들어서다 보니 주민들이 마을 앞 갯벌에서 무언가를 캐고 있다. 온 동네 주민이 다 나온 듯하다. 한 어르신에게 여쭈니 바지락을 캔다고 한다. 1년에 한 번씩 이맘때면 하루 날을 잡아 마을 사람들이 모두 나와 이렇게 품앗이를 한다고 한다. 물론 자신이 캔 것은 자신이 가져간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이것이 바로 바래하는 것이구나 싶다. 정해진 길을 벗어났지만, 어쩌면 여전히 바래길을 걷고 있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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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후 기자

    • 이서후 기자
  • 문화체육부에서 문학/영화/연극/뮤지컬 등을 맡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