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충우돌 산티아고 순례길 17편

새벽에 잠에서 깼어요. 귀마개를 하고 잤는데도 어디선가 계속 와글와글 소리가 납니다. 시계를 보니 오전 3시 30분. 다시 잠들려고 눈을 감아도 잠이 오지를 않아 4시쯤 일어났어요.

귀마개를 빼니 와글거리는 소리가 더욱 크게 들리는 거예요. 가만히 듣고 있자니 알베르게 뒤편 지난밤 록밴드 공연이 열렸던 곳에서 나는 소리였어요. 아직도 스페인의 밤은 잠들지 않았던 거죠. 조심조심 제 짐을 다 거두어 1층 부엌으로 내려갔어요.

오늘은 제가 일등이에요. 침낭 개고 옷 갈아입고 발에 바셀린 바르고 선크림 바르고 아침마다 하는 일을 하고 있는데 누가 오는 소리가 들려요. 어제 만나 라면 파는 식당을 찾아 준 한국 젊은이 두 명이네요. 이 친구들도 잠이 오지 않았나 봐요. 서로 준비한 음식으로 아침식사를 하고 있으니 사람들이 하나둘 내려오기 시작합니다. 오늘은 한국팀하고 아침을 열게 되어 기분이 더욱 좋네요. 출발하려고 알베르게 대문을 여는 순간 깜짝 놀랐어요. 아직도 밖에는 많은 사람이 삼삼오오 앉아 술을 마시거나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요. 정말 시장에서 나는 소리같이 시끄러웠어요. 이 새벽까지! 정열의 스페인 사람들 대단합니다.

부르고스를 빠져나오는 길에 서서.

부르고스는 아직 어둠에 싸여 있고 도시를 한참이나 걸어 나와야 했어요. 도시에는 가로등 불이 켜져 있어 어둡진 않지만 자칫하면 길을 잃기가 쉬워요. 너무 길이 많아서지요. 정신 똑바로 차리고 조개 모양 보도블록(카미노 표시)이나 화살표를 잘 찾아야 한답니다. 그런데도 어찌하다 보니 정말 길을 잃은 거예요. 아까 순례자 두 명이 분명히 우리 앞에 갔었는데 이상도 하지요. 그래도 찻길을 따라가면 나중에라도 합류할 것 같아 계속 앞으로 걸었습니다.

마침 작은 마을이 나왔어요. 누구에게 물어보려고 해도 새벽이라서 사람들이 하나도 보이지를 않는 거예요. 여기로 갔다 저기로 갔다 하고 있는데 할아버지 한 분이 지나가시더라고요. 에고 반가워라. '카미노 데 산티아고?' 하고 물으니 손가락으로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얼마를 걸어 알려주신 길을 찾아가니 순례자들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이제야 제 길을 찾았네요.

마침 마을이 보이고 바르(bar·카페 비슷한데 커피나 음료도 먹을 수 있고 간단한 요기도 하는 곳)가 눈에 보이네요. 한참을 헤맸던 우리는 바르에 들어가 토르티야(tortilla·멕시코식 전병)랑 보카디요(bocadillo·스페인식 샌드위치)도 먹고 그도 부족해 크루아상을 더 시켜서 먹었습니다.

먹고 있는데 어제 종일 같이 걸었던 스페인 아저씨가 들어옵니다. '올라' 하고 슬쩍 인사하고는 옆 바르로 가더라고요. 말도 없이 혼자 와버렸으니 맘이 상했겠죠. 내가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할 텐데 찾아가서 말하기도 뭣하고 해서 그냥 출발해서 왔답니다. 그리고 잠시 후 나를 다시 한 번 지나쳤는데 또 '올라'만 하고 잰걸음으로 지나쳐 가버리더라고요. 어찌나 미안하던지요. '아저씨의 순수한 맘은 다 안다고요, 너무 맘 상하지 마세요∼.'

어제 너무 힘들어서일까요? 등의 짐이 너무 무겁습니다. 오늘따라 발도 더욱 피곤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루쯤은 쉬고 걸어줘야 하는데 하루도 쉬지 않고 20~30㎞ 이상을 매일 걸으며 강행군을 했고 급기야 어제는 40㎞ 정도를 걸었으니 몸살이 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지요.

높고 뜨거운 평원, 메세타 지역에 들어서는 순례자.

이제 메세타 지역을 걷게 됩니다. 스페인에서 볼 수 있는 지형인데 고도 700~900m 고지대에 형성된 초원이에요. 이 길을 걸었던 사람들은 극명하게 다른 두 종류의 느낌으로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한 부류는 '카미노 전체 길 중에서 풍경이 가장 단조롭고 엄청난 햇살이 내리쬐는데다가 나무가 없어 햇볕을 피할 데도 없고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엄청나게 힘이 들었다'고 해요. 반면에 '사방이 뻥 뚫린 광활한 대지를 품은 메세타에 압도당했고 이 길을 걸을 수 있었다는 것이 가슴 벅찼다, 많은 영감을 얻을 수 있었고 사색하기 좋았다'는 사람들도 있어요. 저는 '만약 다음에 카미노에 와서 일정이 짧다면 꼭 메세타만을 걷겠다, 메세타야말로 진짜 카미노'라는 글을 읽은 후 메세타에 관해 기대가 컸어요. '메세타를 걷지 않고 메세타를 논하지 마라'는 글도 읽었고요.

아, 정말 밀밭이 끝없이 펼쳐집니다. 태양은 너무나 뜨겁습니다. 배낭엔 누가 돌덩이를 넣어놨을까요? 그래도 아직 초입이라 밀밭 사이에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미루나무가 있는 작은 숲(?)이 있더라고요. 마침 자리도 비어 있어요. 완전히 지쳐 있던 나는 양말도 벗고 배낭을 베고 누워버렸죠. 천국이 따로 없었어요. 스치는 바람과 풍경이 얼마나 멋진지 여기가 알베르게였으면 무조건 쉬어가는 건데 아쉬웠습니다. 계속 그곳에 머물고 싶었지만 일어나야죠.

메세타 지역을 지나며 본 마을 이정표. 오르니요스 델 카미노로 향한다.

원래 온타나스까지 걸으려고 계획했는데 너무 힘이 들어 오르니요스 델 카미노에서 짐을 풀게 되었어요. 여기 공립 알베르게는 안 좋다고 소문이 나서 사립 알베르게에 묵기로 했습니다. 시설도 깨끗하고 사람들도 많지 않아 좋았어요. 조금 있으니 아침에 함께 출발했던 한국 젊은이들도 저와 같은 알베르게에 묵게 되었어요. 오다가 서로 헤어졌었는데 말이죠.

씻고 산책하러 나갔는데 너무 조그만 동네라 갈 곳이 별로 없더군요. 내일 갈 방향이 어디인지 살펴보고 성당도 돌아보고 숙소로 오는데 한국인 학생 하나가 길가 벤치에서 혼자 맥주를 마시고 있다가 벌떡 일어나 인사를 합니다. 매우 고마웠어요. 공립 알베르게에 묵고 있대요. 혼자 왔는데 한국인 누나 세 명을 만나 같이 다니며 맛있는 것도 많이 먹는다더군요.

오늘은 한국 음식을 해먹기로 했습니다. 마침 주방도 깨끗하네요. 저번처럼 밥을 하고 멸치 몇 마리 넣은 라면수프 감잣국에 달걀말이, 그리고 샐러드까지. 또 행복했습니다. 모처럼 먹는 밥, 정말 꿀맛이었습니다. 이 젊은이들도 엄청나게 잘 먹더라고요. 남은 쌀은 서로 나누어 배낭에 넣어 두었습니다. 식사 후 감기 걸린 한국 친구들에게 감기약을 나눠주고 저도 꿈나라로 가보려 했지만 쉽지 않아요. /글·사진 박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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