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툰 목수 세상에서 살아남기] (2) 내 맘 가는대로 산다

◇비에 젖은 낙엽처럼 버텨라

2014년 가을쯤 목공소 근처 술집에서 열린 초등학교 동기회 모임이었습니다. 나이가 오십대 초반이었으니 거의 40년 만에 만난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낯설기도 했지만 빈 소주병이 늘면서 어색함은 누그러졌고, 수다 주제는 먹고사는 문제로 넘어갔습니다. 베이비붐 세대의 끝자락으로 구조조정이니, 명예퇴직이니 하는 얘기가 자연스러운 것이었죠.

언론사 간부인 한 친구는 술기운이 오르자 "사실 요즘 은연중 명퇴 압박을 느끼고 있다"며 "퇴직을 해도 한 달에 천만 원쯤은 벌어야 살 수 있을 텐데"라고 했습니다. 아이들 뒷바라지도 그렇고, 취미생활도 그렇고 퇴직 후에도 그 정도 수입은 있어야 한다는 얘기였죠. 평생 단 한 순간도 그런 거액을 벌어본 적이 없었던 자격지심 탓이었을까요. 속에서 뭐가 확 올라오는데, 입으로 뱉어내기는 좀 그랬습니다. 속으로 "네놈 손으로 한 달에 백만 원만 벌어봐라"라는 얘기가 입속을 맴돌았지만 말입니다. 이미 술 맛도 떨어져 버렸고, 밤늦도록 그런 얘기로 앉아있기도 싫고 해서 그 친구에게 한 마디하고 자리를 털었습니다. "친구야! 회사에서 암만 눈치를 줘도 가을비에 젖은 낙엽처럼 버텨라"라고. 비 젖은 낙엽 쓸어본 적 있습니까?

그런데 며칠 전 퇴직을 앞둔 한 초교 교사가 급여 내역서를 온라인에 공개해 화제가 됐었죠. 800여만 원의 액수를 두고 많으니 적으니 하는 논란도 일고 그랬죠. 이제 돌이켜 보면 그 친구의 기대가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습니다.

창동예술촌 입주작가 윤귀화 씨가 작업복에 적어준 '창동 황목수'.

◇나 혼자 먹고살 만하면 되는 거지?

저는 좀 기분대로 사는 편입니다.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좀 속 편하게 사는 스타일이죠. 그래서 사표를 던지거나 직업을 바꾸거나 하는 순간마다 주변 사람들에게 걱정을 많이 끼쳤습니다. 목공소를 열었을 때에도 그랬습니다. 가족은 물론이고 자주 찾아오는 친구나 선후배들의 눈길에서 더러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 인간이 목수 일을 해낼 수 있을까, 또는 밥은 먹고살 수 있을까 하는.

자영업 첫해였던 2013년. 제가 친구들로부터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먹고살 만하냐"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면 먹고살기에 충분한 걸까요? 아이들의 학비와 서울 생활비, 용돈, 그리고 아내와 저의 생활비를 따지면 결론은 '많이 벌면 벌수록 좋다'였지만 제 능력이 모자란 걸 어떡합니까. 걱정한다고 해결된다면 마냥 걱정해야죠. 걱정해봐야 소용없는 일이었습니다. 미안하지만 아내에게 모든 짐을 던져두고 외면했습니다. 먹고살 만하냐는 질문이 올 때마다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기 입구 대들보에 써놓은 글귀 보이냐. 마음이 착한 사람들만 볼 수 있다." 저는 거기에 마음으로 이렇게 써놓았습니다. "월세를 잘 내자!" 제 목표가 그랬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시작했고, 그렇게 유지할 수 있다면 됐다. 월세만 밀리지 않으면 됐고, 조금 더 벌어 아내한테 조금이라도 생활비를 보탤 수 있으면 더 좋고, 그 정도만 생각했습니다. 서툰 목수가 그 정도면 충분한 것 아닌가, 라고.

솔직히 먹고사는 것에 불안감이 왜 없겠습니까. 그해 초여름쯤으로 기억합니다. 월세를 내고 나니 호주머니와 은행통장을 탈탈 털어 단돈 3만 원이 남았더군요. 눈앞이 캄캄했죠. 먹는 것이야 집에서 먹고, 목공소에서는 라면 끓여 먹으면 된다 했지만 다음 달 월세부터는 어떻게 하지 하고 걱정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기적이 생겼습니다. 어떤 단체로부터 나무가 아닌 금속제품 제작대행 의뢰를 받아 견적을 했는데, 예산과 견적금액과 똑같아 제게는 아무런 이익이 없었습니다. 노느니 장독 깬다 했던가요. 그냥 노는 것보다는 나을 테지, 하며 일을 맡았던 그날 저녁, 처마 밑에 찾아든 제비가 살 집을 만들어 달라는 주문을 했던 고객과 대화 도중 상당히 저렴한 가격에 그 제품을 만들 수 있는 상담이 성립됐습니다. 갑자기 몇백만 원의 이익금이 생겼습니다. 제게는 기적 같은 행운이었고, 덕분에 위기를 넘겼죠. 지금 생각해보면 그 제비가 흥부전 속의 제비 아니었을까요? 근데 내가 부러진 제비다리를 고쳐주긴 했나? 하하.

마산YWCA가 운영하는 마산건강가정지원센터와 다문화가정지원센터가 주최한 목공교실에서 어린이와 놀고 있는 황 목수.

이때 말고도 몇 차례 위기가 있긴 했지만 그럭저럭 버티고 넘어왔고, 오늘 세어보니 무려 마흔두 번의 월세를 밀리지 않고 꼬박꼬박 냈으니 스스로 기특합니다. 아내에게도 넉넉하지 못하지만 조금씩이나마 생활비를 보태고 있으니 먹고살 만하다고도 할 수 있겠죠. 물론 아내는 "당신 혼자 먹고살 만하지"라고 말합니다. 동의하는 것 맞나요?

◇'인맥'은 '치맥'과 가장 어울리는 존재

인터넷에도, 서점에도 인생 2막이니, 3막이니 하면서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따위의 얘기가 널렸습니다. 저도 물론 많이 참고했고, 그런 얘기들을 되씹어보고도 합니다. 하지만, 사람마다 처한 상황은 얼굴 생김새만큼 각각 다른 만큼 그 어떤 조언이든 지침서든 절대적일 수 없겠지요. 그러니 새로이 인생방향을 찾아야 하는 중년들은 자신의 입장이나 형편에 따라 좀 더 면밀하게 전망과 계획을 다듬어야 할 겁니다.

저는 굳이 창업을 권하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해왔던 일과 관련한 직장에 재취업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수입이나 지위에 대한 눈높이만 맞출 수 있다면 익숙한 일을 이어가는 것도 좋다고 봅니다.

사업을 벌이거나 자영업을 하고자 한다면 수입이나 성장 가능성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것이 일반적이겠지만, 저는 무조건 '스스로 즐거워할 수 있는 일'을 찾으라고 하겠습니다. 돈을 많이 벌고 싶다고 절대로 많이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다들 아시죠. 저처럼 제가 즐거운 일을 찾으면 돈이 그냥 따라옵니다. 혼자 간신히 먹고살 정도에 불과하기는 하지만요. 하하.

판매에 실패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1년 장기 무상임대로 내돌리고 있는 아기침대. 가장 먼저 임종윤 군의 첫 아들 이준을 거쳐 지금은 지난 2월 태어난 이대근 군의 첫 아들 광현이 사용 중.

장사를 하는 데에는 인맥이 약이 될 수도, 독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십오 년 전에 잠깐 보험영업을 해봤고, 지금은 마산 구도심인 창동에서 목공소를 하고 있지만 인맥을 장사에 끌어들이는 것을 조심하는 편입니다. 지금도 저는 아는 사람의 주문은 불편합니다. 안다고 싸게 해주기도 싫지만, 상대가 비싸다고 느끼면 인간관계도 불편해지니까요.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나, 저를 좋아해 주는 사람은 만나서 즐겁고, 함께 술 한 잔 나누면 더욱 즐거우니까 딱 그 수준으로 있는 것이 좋습니다. '인맥'은 더운 여름밤 시원한 '치맥'을 나눌 때 가장 만족감이 높은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높은 지위에 있었거나 소위 잘나가던 분이라면 빨리 그 기억을 지워버리시길 권합니다. 그러지 못하면 마음 상할 일이 엄청 많을 겁니다. 또 한 가지. 빨리 이웃들과 친해지십시오. 일거리는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줍니다. 그냥 주는 것이 아니고 한동안 관찰해보다가 "이 사람에게 일을 맡겨도 되겠다"고 할 때 줍니다. 동네서 인심 잃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제 목공소는 '노래방의 숲' 입구에 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자리를 잡았는데 연장 소음 같은 문제도 있지만 별로 항의를 받지 않았습니다. 이웃 할배, 할매, 형, 누나, 동생들과 비교적 원만하게 지내는 덕분이라 생각합니다. 이것 말고도 이런저런 주의사항이 있지만 당장 생각나지 않아, 다음 기회에.^^

/글·사진 황원호(54·창동목공방 대표)

※이 기사는 경남도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주민참여사업 지원으로 이뤄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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