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결문에서 꺼낸 이야기]대포통장 배달만 해도 유죄
재판부 "예전에도 같은 일로 조사…내용 알았을 것"징역형

10년 가까이 오토바이 배송 일을 하던 ㄱ(54·김해시) 씨는 지난해 4월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인적사항을 밝히지 않은 상대방은 "김해 또는 창원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하는 수화물에 사업 샘플이 담겨 있다. 이를 받아서 큰 상자에 넣어 '○○상사'라고 기재한 후 안산시외버스터미널로 보내라. 10개 이하는 25만 원, 11~15개는 30만 원, 16~20개는 35만 원, 20개 이상은 40만 원을 송금하겠다"고 했다.

사실 이 내용물은 보이스피싱에 이용하기 위한 대포통장·체크카드였다.

ㄱ 씨는 이 사실을 모른 채 의뢰를 받아들였고, 8일에 걸쳐 일을 처리하고 280만 원을 받았다가 전자금융거래법 위반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ㄱ 씨는 재판 과정에서 상자 안에 들어 있던 내용물이 무엇인지 몰랐기에 죄가 없다는 취지의 주장을 펼쳤다. 하지만 재판부는 ㄱ 씨에게 죄가 있다고 판단했다. 지난 12일 창원지법 형사1단독(서동칠 부장판사)은 ㄱ 씨에게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고, 아울러 사회봉사 120시간을 명령했다.

재판부는 ㄱ 씨가 수화물 내용을 알았거나 적어도 미필적으로나마 이를 용인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 근거로 △김해 또는 창원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하는 수화물들을 수거해 큰 상자에 넣은 다음 다시 버스 편으로 안산으로 보내는 방식인데, 번거롭고 비용·시간도 많이 소요될 뿐 아니라 분실·훼손 위험도 커 정상적인 거래 관계에서는 이렇게 할 이유를 찾기 어려운 점 △의뢰한 성명불상자는 자신의 인적사항과 '○○상사' 주소를 전혀 알려주지 않은 점 △이에 대한 대가로 고액을 지급한 점 등을 들었다.

특히 "ㄱ 씨는 10년 가까이 퀵서비스업을 하고 있었고 수년 전에는 보이스피싱 범죄에 사용된 통장을 배달한 일로 경찰 소환조사까지 받은 적이 있어 이 같은 사실(보이스피싱 범죄 관련 내용물)을 잘 알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조장현 공보판사는 "전달적 기능의 퀵서비스 기사라고 하더라도 사회 통념상 이례적으로 보이는 배송에 관하여는 상당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점을 선언한 판결이라 할 수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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