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충우돌 산티아고 순례길] 16편…딸의 문자메시지에 문득 그리워진 그 맛

◇7월2일 비야프랑카 몬테스 데 오카에서 부르고스까지 37.2㎞ = 새벽에 일어나 알베르게 겸 호텔을 나왔어요. 너무 어두워서 누가 오면 함께 출발하려고 하는데 다른 알베르게에서도 나오는 사람이 없어요. 한 시간 넘게 기다려 겨우 출발할 수 있었어요. 길은 험하지 않아도 계속 산길로 이어지고 있어요. 한 할아버지가 빠르게 따라옵니다. 한 60대 중반쯤 되었을까? 자기는 스페인 사람인데 혼자 왔느냐고 물어서 나는 한국에서 왔고 혼자라고 했습니다. 같이 걷겠답니다. 아무튼 이분은 영어를 한마디도 못했는데 어떻게 이만큼이라도 통하는지 신기하기만 했어요. 전 걷다 보면 늘 그렇듯 다시 혼자 걷게 될 줄 알았어요. 그런데 이분은 내가 빨리 걸으면 빨리 걷고 늦게 걸으면 늦게 걷고 계속 속도를 맞추어 걷는 거예요. 사실 약간 부담스러웠어요. 하지만 이분이 아니었으면 산길 무인구간 12㎞가 무섭고 심심할 뻔도 했어요.

함께 순례길을 걷던 스페인 아저씨.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아타푸에르카(Atapuerca. 지난 1994년 마을에서 12㎞ 떨어진 곳에서 인류의 조상으로 알려진 호모 앤티세서가 이 인근에서 발굴됐다.- 편집자 주)를 지나 마타그란테봉을 향해 오르기 시작합니다. 여전히 스페인 아저씨와 함께요. 날씨는 더워지고 체력은 바닥나고 있는데 가도 가도 부르고스가 나타나지 않아요. 스페인 아저씨가 지나는 사람에게 물으니 4㎞ 남았대요. 그런데 또 한없이 가는 거예요. 정말 너무 힘이 들었어요. 하는 수 없이 공원에서 자리를 펴고 앉아 버렸어요. 거기서 쉬며 번역기를 이용해 이야기를 나눴지요. 68세라는 스페인 아저씨는 자기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어디서 산다, 이름은 뭐라고 하셨는데, 생소한 이름들이라서 지금 생각이 나지를 않네요. 다시 출발해서 걷는데 이번엔 길까지 잃은 것 같아요. 외곽의 어느 레스토랑에 들러 물으니 또 4㎞가 남았대요. 그곳에서 화장실도 가고 물도 얻어먹고 어찌어찌 시내로 겨우 들어왔어요. 아저씨는 자기 잘못도 아닌데 계속 괜찮으냐며 내 얼굴을 살핍니다.

◇라면 파는 식당을 찾아 = 큰 강을 낀 부르고스는 너무나 큰 도시였어요. 강가에서 수영을 하고 일광욕을 하는 사람들을 보니 저도 물속에 '퐁당' 들어가고만 싶었지요. 제가 가고 싶은 알베르게가 있었는데 너무나 지쳐서 그냥 가까운 공립 알베르게로 들어와 버렸어요. 큰딸한테서 문자가 왔는데 부르고스에 라면을 파는 데가 있대요. '라면' 소리를 듣는 순간 갑자기 한국 음식이 못 견디게 먹고 싶은 거예요. 스페인 아저씨는 다행히 좀 잔다고 하더라고요. 저도 정말 정말 쉬고 싶었는데 라면이 너무 먹고 싶은 마음에 씻자마자 거리로 나섰어요. 그런데 딸이 라면을 먹었다는 광장 쪽에 가서 아무리 찾아도 라면 파는 데를 찾지 못했어요.

마침내 도착한 대도시 부르고스 거리.

피곤한 몸을 질질 끌고 나왔는데 눈물이 날 것 같았어요. 하는 수 없이 멀리 떨어져 있는 슈퍼를 찾아가서 이것저것 먹을 것을 사서 숙소로 돌아오다가 한국인 젊은이 둘을 만났어요. 혹시 라면 파는 데를 아는지 물어보니 자기들도 찾다가 햄버거만 사서 그냥 왔다며 나가서 다시 한 번 찾아보겠다고 하더라고요. 일단 숙소에서 기다리기로 하고 들어왔어요. 숙소에 오니 그 스페인 아저씨가 함께 저녁식사를 하러 가재요. 사실은 오늘 고맙기도 했지만 온종일 함께 있어야 하는 것이 많이 부담스러웠어요. 그래서 살짝 거짓말을 했어요. 오늘 한국 친구들 만나서 한국 음식 먹으러 가기로 약속했다고요. 알았다며 혼자 나가는데 조금 미안했어요. 근데 기다려도 라면집 알아보러 간 친구들이 오지 않아 다른 거라도 먹으려고 나가는데 이 친구들이 밝은 얼굴로 들어왔어요. 라면집을 찾았다고요! 같이 먹으러 가자고 했죠. 가 봤더니 아까 내가 찾았던 곳인데 라면이라는 글이 하도 조그맣게 쓰여 있어서 제가 못 봤던 거예요. 자기들은 저녁을 먹었다고 해서 일단 두 개를 시켰는데 쌀로 만든 밥과 함께 나오더군요. 한국에서는 라면을 잘 먹지도 않는데 스페인의 도시 노천 카페에서 먹는 라면 맛은 그야말로 환상적이었어요. 국물까지 싹 먹어 버렸어요.

마침내 도착한 대도시 부르고스 거리.

◇왁자한 스페인 도시의 밤 = 정말 몸은 무지무지 피곤하지만 이대로 숙소로 들어갈 수는 없었어요. 발길을 시내로 돌렸죠. 그런데 도시 사람이 다 나온 걸까요? 그야말로 인산인해! 주말인가 싶어 확인해 보니 그도 아니었어요. 아! 이게 말로만 듣던 그 스페인의 밤 문화구나! 가족과, 연인과, 친구와 함께 나와 왁자하게 즐기고들 있었어요. 광장마다 작은 퍼포먼스나 공연을 하고 있었고 사람들의 표정도 즐거워 보였어요.

마침내 도착한 대도시 부르고스 거리.

저도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나름 즐기다 숙소로 오니 숙소 뒤편에서 크게 음악 소리가 나는 거예요. 소리를 따라 가보니 제 또래쯤 보이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록 밴드가 공연을 하고 있었어요. 신나더라고요. 저도 음악에 맞춰 장단도 맞추고 즐기고 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끝나버리네요. 진즉에 올 걸. 아쉬움을 달래며 숙소로 오니 아직 9시밖에 안 되었어요. 다시 좀 씻고 귀마개하고 막 잠자리에 들었는데 누가 큰소리로 깨우는 거예요. 깜짝 놀라 귀마개를 빼고 일어나니 스페인 아저씨였어요. 벌써 많이들 자고 있는데 하도 큰소리로 말을 해서 '쉿쉿!' 하며 밖으로 나왔죠. 들어보니 '왜 벌써 자느냐, 밖은 흥겨운데' 이런 요지의 말인 것 같았어요. 그리고 '내일 몇 시부터 걸을 거냐, 같이 걷자'고요. 그래서 '나는 오늘 너무 피곤했기 때문에 몇 시에 출발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약속하기가 어렵다, 미안하다'고 하며 다시 잠자리로 돌아왔어요. 분명히 이 아저씨가 저한테 딴 맘을 먹고 이러는 것이 아닌 건 알아요. 단지 혼자 왔다고 하니 친구가 되어주고 싶어서 그러는 건데 전 사실 많이 부담스럽거든요.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었지요. 눈치 없고 착한 아저씨 안녕히 주무셔요∼. /글·사진 박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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