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툰 목수 세상에서 살아남기] (1) 케 세라 세라(que sera sera)

40대 초반에 직장을 그만둔 '베이비부머 끝자락' 독자 황원호(54) 씨가 자신의 생활 분투기를 직접 쓰는 기획(격주 월요일 게재)을 마련했습니다. 이 기획은 노후 대비를 위한 재정적 문제뿐 아니라 100세 시대를 맞은 은퇴자의 '2막 인생 찾기'를 고민해보는 기회를 제공할 것입니다. 더불어 예술촌으로 바뀌고 있는 재생 도심 유흥가 한복판에 생뚱맞게 차려진 목공소(창원시 마산합포구 창동목공소)에서 벌어지는 소소한 일상을 통해 드러나는 서민들 애환도 조명할 예정입니다.

벌써 20년이 다 돼 갑니다. 원인이 뭐였는지 여전히 잘 모르지만 부모 형제 모두를 실업자로 만든 IMF(국제통화기금) 외환 위기가 왔고, 저도 마찬가지로 1998년 다니던 회사가 부도로 쓰러지면서 실업자가 됐습니다. 삼십 대 중반에 불과했지만 직장 생활 염증을 느끼고 있던 탓에 자빠진 김에 좀 쉬어가자는 생각도 없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생계에 불안을 느낀 아내는 집에 딸린 조그만 가게에서 수제비 장사를 하겠다고 나섰고, 급기야 집 수리를 시작했습니다. 퇴직금도 받지 못한 상황이었지만 이왕 고치는 거 나무를 재료로 해서 따뜻하고 자연스러운 공간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목수 두 명이 실내 계단을 만들고, 비대칭 통유리 창틀과 출입문도 나무로 짰습니다. 외국 잡지에서 베껴 두툼한 사각형 통나무 세 개를 천장을 가로지르게 걸쳐 나름 멋을 부리기도 했죠. 비용을 아끼기 위해 허드렛일은 당연히 백수인 제 몫이었습니다.

◇건강 악화로 직장생활 접고 하고 싶은 일 해보자 결심

내심 일식조리사 일을 배워볼 요량으로 일식집 이 곳 저 곳을 기웃거리던 제게 목수 일은 눈이 번쩍 뜨이는 흥미로운 발견이었습니다. 마치 초등학교 시절 수수깡으로 안경이나 기린을 만들었던 때처럼 목수 일을 가까이서 구경하는 것은 너무 재미있었습니다. 톱니 모양의 계단목 각도를 계산하는 것도, 대패로 매끈하게 표면을 다듬는 일도 어렵지만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핏줄이 뚜렷한 근육질의 목수 팔뚝도, 얼굴에서 흐르는 땀을 막기 위해 목에 두른 수건조차 멋져 보였습니다. 집 수리가 끝날 무렵 소주잔을 나누는 자리를 만들어 그동안의 느낌을 얘기하고, 목수 일을 배우고 싶다는 말을 건넸지만 실망스럽게도 답변은 일언지하 거절이었습니다.

미련은 끈적거렸지만 시간은 그냥 그렇게 흘러갔고, 어찌어찌 지긋지긋해하던 그 직장생활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다시 직장을 다니면서도 언젠가는 언젠가는 하며 요리학원에서 일식요리를 배우면서 막연하게 이직을 생각했습니다. 예정한 것처럼 갈등은 찾아왔고 처음으로 스스로 사표를 던졌습니다. 그 뒤 무려 여섯 차례에 걸쳐 직장을 바꿔가면서 점점 몸도 마음도 지쳐갔습니다. 그리고 같은 직장을 두 번째 다니던 2011년 사무실 근처에서 자그마한 취미 목공방을 만났습니다. 휴가비를 몽땅 털어 성급하게 대패와 손톱, 숫돌을 샀죠. 하지만 대패는 집 짓는 목재를 마감하는 대목용이고, 손톱은 가구 짜는 소목용이고, 숫돌은 날을 벼린 뒤 녹나지 않도록 광을 내는 마감용이었던 사실조차 그땐 몰랐습니다. 다시 만난 나무는 나를 그렇게 설레게 했고, 조급하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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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원호 목수가 창동목공방에서 가구 표면을 샌더로 다듬는 모습. /김만태 사진작가

하지만 그해 가을 비만을 부른 과음 과식, 흡연, 운동 부족 등 뻔한 원인으로 시작된 건강 이상은 툭하면 코피로 터지는 고혈압 증상을 드러냈습니다. 겨울 들어 건강은 우울증과 공황장애라는 진단으로 악화되면서 결국 직장생활을 접기로 했습니다. 아내와 두 아이가 여전히 대학에 다니고 있어 돈벌이를 해야 했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었습니다. 이러다 죽을 것 같다는 공포감도 들었습니다. 무작정 사표를 던졌습니다. 지금 와서 가만히 따져 보니 여섯 곳의 직장을 무려 여덟 차례 들고나고 했습니다. 스스로도 어지간했다 하지만 지켜본 가족들도 정말 불안했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 직장을 그만두고 넉 달 동안 건강을 핑계로 이불을 덮어쓰고 누워만 지냈습니다. 그러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자 이대로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줄곧 생각했던 한옥학교로 가기로 했습니다. 하고 싶었던 일이라도 해보고 죽든 살든 끝을 보자는 심정으로, 동생과 전 직장 동료 등 주변 사람들을 괴롭혀 어렵게 학비를 마련했습니다. 학비는커녕 생활비도 못 주는 가장으로서 차마 아내를 괴롭힐 수는 없었습니다.

◇청도 한옥학교에 입학했지만 난관에 부딪히고

2012년 5월. 집 수리 때 처음 목수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지 십오 년 만에 청도한옥학교(경북 청도)에 입학했습니다. 전통 한옥을 배우는 과정이었습니다. 전통 방식 가구 짜기를 배우는 과정도 있었지만, 집을 짓는 것에 더 끌렸습니다. 체인톱을 휘둘러 나무를 깎고, 끌과 대패로 다듬어 짜맞춤 방식으로 집을 짓는 일은 정말 매력적입니다. 산 중턱에 있는 한옥학교 생활도 좋았습니다. 새벽에는 산길을 올라가 폭포 물을 맞기도 했고, 108배로 몸과 마음을 다듬으면서 건강도 쉽게 회복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건강이 좋아지자 교칙을 어기고 보름달이 환하게 비추는 교내 팔모정에서 피아노 연주를 들으며 동기 형님과 밤 늦도록 막걸리 추렴을 하던 기억도 새롭습니다.

하지만 심각한 난관에 부딪히고 말았습니다. 변명일 뿐이지만 집 짓는 목수를 하기에 몸이 여전히 갖춰지지 않아 학교생활 내내 허리 통증에 시달린 데다, 오랫동안 인연을 이어온 분의 부탁으로 한동안 다른 일을 해야 했습니다. 졸업과 동시에 나가야 할 한옥 일판과는 서서히 멀어졌습니다. 또다시 갈등에 빠졌지만 가구를 만들어보기로 방향을 바꾸고, 다행히 집 근처 칠순이 넘은 가구 목수 한 분의 도움을 받아 아주 잠깐이지만 가구 제작 견학과 실습을 경험했습니다.

◇실력도 경험도 없이 덜컥 차려버린 목공방

조급해진 마음만큼 시간도 빨리 흘러 연말이 다가왔고, 실력도 경험도 없었지만 그냥 점방을 열기로 마음먹고 운 좋게 창동(현재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창동) 한 귀퉁이에 장소를 얻었습니다. 2012년 12월 31일 자정, 또는 2013년 1월 1일 0시. 마치 저의 개업을 축하라도 하듯 신년 축하 종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가까운 친구들과 개업 전에 참여해 준 몇몇 회원들이 축하해주는 가운데 창동목공방을 차렸습니다.

▲ 창원시 마산합포구 창동에 차린 창동목공방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한 황원호 대표./박일호 기자 iris15@idomin.com

서툰 목수의 어설픈 개업이었습니다. 시쳇말로 '무대뽀 정신'으로 밀어붙인 것이었죠. 요즘 인터넷에는 젊은 목수들이 스스로 별명을 지어 쓰는 것을 봅니다. 낭만목수, 방랑목수, 골목목수, 동네목수 등등. 저는 스스로 서툰 목수라고 붙였습니다. 사실이니까요. 목수 일을 시작한 뒤 알게 된 몇몇 분들은 "이제 서툰 목수란 말을 쓰지 마라. 손해 보는 말이다"라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앞으로도 당분간 서툰 목수를 그대로 쓸 겁니다. 스스로 아니라고 판단될 때까지 말입니다. 사실 좀 게으른 면도 있어서 실력이 빨리 늘지 않는다는 지적도 받습니다만 점점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니까요.

제 인생의 네 번째 직업이자, 아홉 번째 직장에서 사장 겸 직원이 됐습니다. 4년째 '서툰 목수의 세상에서 살아남기'는 위태로워 보이지만 이럭저럭 넘어가고 있습니다.

케 세라 세라!(que sera sera!). 되는 대로 하다 보면 언젠가는 이루어진다는 말이 틀리지 않은 것 같습니다. /황원호(창동목공방 대표)

※이 기사는 경남도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주민참여사업 지원으로 이뤄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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