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충우돌 산티아고 순례길] 15편

오늘은 늦잠 자고 조금만 걸으려고 작정을 했는데 새벽부터 눈이 떠져요. 아침식사를 하고는 '그래~! 더워지기 전에 걷지 뭐!' 하고 일어나 준비하고 걷는데 피곤함도 덜하고 걸을 만한 거예요. 목적지인 토산토스(Tosantos)에 도착하니 10시도 안 되었어요. 일러도 너무 일러 조금 더 걷기로 했어요.

정말 넓디넓은 밀밭을 지나고 또 지나는데 오늘따라 밀향이 더욱 진하게 나네요. 이곳 사람들이 왜 빵을 먹는지 이해가 가더라고요. 땅 모양이 구릉처럼 생겼으니 물을 가두어 키우는 벼는 안 되고 밀을 심을 수밖에 없는 거죠. 저도 매일매일 빵을 먹었는데 생각보다 다행히 힘들지 않았어요. 처음엔 걱정을 많이 했는데 먹다 보니 먹을 만하더라고요. 아마 제가 빵 체질인가 봐요. 하하.

▲ 토산토스 가는 길 밀밭. 다른 순례자와 함께. 찰칵.

▲ 그라뇽을 떠나는 아침. 순례자들을 비추는 일출.

비야프랑카 몬테스 데 오카(Villafranca Montes de Auca·'오카 산 기슭에 있는 프랑스인 마을'이란 뜻으로 오래전부터 프랑스에서 온 순례자나 장인들이 정착해 사는 마을)까지 왔는데도 낮 12시가 채 안 되었어요. 오는 길에 어떤 아저씨가 알베르게 안내장을 주고 갔는데 호텔에 딸린 알베르게이고 10, 8, 5유로 이렇게 구분이 되어 있어서 선택도 할 수 있겠더라고요. 그래서 오늘은 공립 알베르게를 지나쳐 호텔로 가 보았어요. 호텔 로비에 가니 먼저 10유로를 권하데요, 노! 8유로? 노! 5유로? 오케이~!

들어가 보니 제가 제일 먼저 알베르게에 도착을 한 거였어요. 18명 정도 잘 수 있는 방인데 깨끗하고 아주 좋았어요. 젤 좋은 1층 자리에 짐을 풀고 씻으러 가니 샤워실도 깨끗하고 손빨래하기도 잘되어 있고 호텔의 부대시설을 다 쓸 수도 있고 아주 맘에 쏙 드는 알베르게였어요. 샤워 후 빨래를 너는 곳도 널찍하고 빨래집게까지 넉넉하고, 완전 흡족! 부엌도 깨끗해서 우선 요기를 하고 있으니 오다가 몇 번 만났던 이탈리아인 3인방은 10유로 방에, 켈리 모녀는 8유로 방을 정하고 왔다고 하며 들어가더군요.

알고 보니 10유로 방은 이층침대가 아니었고 8유로 방은 8명이 자는 곳이더군요. 그것만 빼고는 다른 것은 다 똑같이 쓰는 거였어요. 야호~! 오늘은 싼 가격에 좋은 곳에서 묵게 되어 기분이 좋았어요. 그런데 조금 있으니 프랭크 부자도 저와 같은 5유로 방에 들어왔어요. 다른 사람들은 10유로, 8유로 방으로 낚여 들어가고 결국 5유로 방에는 5명이 자는 특혜가 주어졌지요.

비야프랑카 몬테스 데 오카에 있는 성당과 내부.

잔디밭에 내려가니 켈리 모녀가 있더라고요. 오붓하게 말을 해 본 적이 없었는데 오늘은 사람들이 많이 없어서인지 서로 많은 이야기를 하게 되었어요. 사는 이야기, 사는 곳 이야기, 손자이야기 등을 서로 사진을 보여주며 나누었어요. 조금 있으니 프랭크도 내려오더니 이야기를 하자네요. 오다가 카미노를 걷는 프랑스신부님을 만났는데 제 얘기를 했더니 보고 싶어 한다고요. 켈리도 프랭크도 저에게 놀랍다고, 대단하다고 칭찬을 해 줍니다. 그래서 이건 대단한 것이 아니라 '무모한 행동'이라고 했어요. 사실, 걸을수록 그런 생각이 자꾸 들었거든요. 하지만, 그들이 보기엔 영어도 못하고 좌충우돌 걷는 제가 대단해 보였나 봐요.

방으로 들어와 잠깐 누워 있는데 프랭크와 피터가 들어왔어요. 어디서 구했는지 태극기와 카미노의 상징인 조개가 새겨져 있는 배지를 선물로 주더군요. 피터가 샀다면서요. 기쁘게 받아 가방에 달았더니 둘이 다 좋아합니다. 관심을 두는 그들이 너무너무 고마웠어요.

비야프랑카 몬테스 데 오카에 있는 성당과 내부.

오후 7시에 미사가 있다고 해서 갔더니 그 프랑스신부님이 집전하시는 미사였어요. 미사 후 잠깐 인사를 나누는데 말이 통해야 말이지요(ㅜㅜ). 간단히 인사만 나누고 켈리가 추천해 준 호텔식당으로 갔어요. 점심때 먹었는데 아주 맛이 좋았다고 하더라고요. 들어가 보니 프랭크 부자가 먼저 식사를 하고 있다가 옆에 앉으라고 자리를 내주었어요. 여태 순례자 메뉴 먹으러 들어간 식당 중 가장 고급스러운 식당이에요. 가격은 12유로인데 가격 대비 멋집니다.

▲ 비야프랑카 몬테스 데 오카. 주민들이 즐기던 놀이. 뭘까?

피터가 포도주를 따라 주는데 아무 생각 없이 옆에 있는 잔에 포도주를 받았어요. 여태까지 순례자 메뉴를 먹으러 가면 포도주나 물 중에서 하나만 선택할 수 있었고 포도주를 먹는 경우에는 물을 사먹어야 했었거든요. 이곳은 두 가지를 다 제공하는 곳이어서 잔이 두 개 있었는데 제가 모르고 물잔에 포도주를 받은 거예요. 아차! 싶었는데 프랭크가 자기 포도주를 얼른 마시더니 자기 포도주잔에 얼른 물을 따르더군요. 그러니까 피터도 따라 하려고 해서 제가 만류를 했어요, 괜찮다고요. 웃으며 해프닝은 마무리되었고 식사를 다 했는데도 자리를 뜨지 않고 기다려주는 그들을 보며 남을 배려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했답니다. 물론 음식 맛도 아주 좋았고요. '내가 외롭고 힘들어하니 천사를 보내 준 걸까?' 생각하며 방으로 왔습니다.

숙소에 와서 프랭크와 피터에게 "5유로, 5명! 8유로, 8명!" 했더니 둘이 빵 터집니다. 그들도 싼 가격에 오히려 쾌적한 환경인 이 상황이 재밌었나 봐요. 다신 짐을 부치지 않기로 했지만 내일은 부르고스까지 37㎞ 이상을 걸어야 하고 길도 좀 험하다고 해서 짐을 부치기로 하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글·사진 박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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