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한 번 걸어보자'시작, 2001년부터 16년째 이어져, 누구나 자유롭게 모임 참여

2001년 그들을 처음 취재한 후 16년이 지났다. 여전히 그들은 걷고 있다. 매달 셋째 주 일요일마다 거의 빠짐없이 걸어왔으니, 단순히 횟수를 계산해보면 768번에 달한다. '걷는사람들'이 십수 년간 걷고 있는 이유가 문득 궁금해졌다. 4월 셋째 주 일요일인 지난 17일, 그들과 함께 걸어보기로 작심했다. 한두 시간 잠시 걷는 행위로 그들이 왜 걸어왔는지 파악할 수 있을까.

4월에 걷기로 정한 길은 진해 장복산 드림로드였다. 가장 연둣빛이 절정인 계절, 가장 아름답고 걷기 좋은 길로 선택된 곳이다. 오전 11시 40분께 경남 창원시 진해구 구민회관으로 '걷는사람들'이 모여들었다. 20여 명쯤 모였을 때 걷는사람들 인솔자인 송창우 씨가 "이제 출발합니다" 하며 걷기 시작했다.

이날 오랜만에 걸으러 온 사람도 있었고, 매월 참여해온 사람도 있었다. 남녀노소 구분이 없었고 가족, 부부, 남매, 지인들끼리 그리고 송 씨 부부가 데리고 온 견공까지 함께 걸었다. 송창우(49·시인) 씨와 김형준(58·김형준치과 원장) 씨는 정예 멤버다. 또다른 정예 멤버인 박영주(57·역사학자) 씨는 네팔 여행 중이라 이날 참석하지 않았다.

'걷는사람들'이 지난 17일 오전 경남 창원시 진해구 장복산 드림로드 입구∼하늘마루∼진해 평화동 걷기 행사에서 장복산 숲길을 걷고 있다. /박일호 기자 iris15@idomin.com

"오랜만에 오셨네요." "네. 매달 오고 싶었는데 셋째 주마다 시댁에 가야 하고 자꾸 일이 생겨서 그동안 못 왔어요."

"도시락을 안 갖고 왔는데 우짜지?" "같이 먹으면 됩니다. 걱정마세요."

알고 지냈던 사람들도, 처음 만난 사람들도 서로 정겹게 인사를 주고받으며 장복산 드림로드 입구로 걸어갔다.

걷는사람들은 2001년 '그냥 한 번 걸어보자' 하고 걷기 시작했다. 처음엔 마산 시내를 걸으면서 점차 보행권(누구나 안전하고 쾌적하게 걸을 수 있는 권리) 문제를 고민하게 됐고, 걷는 것에 사회와 정치성을 담아보려고 애썼다.

걸은 지 10년이 되던 해 걷는사람들이 표방했던 네 가지 지향은 아직도 유효하다. 첫째, 건강 유지. 둘째, 사유 방식 변화. 셋째, 속도에 속박되지 않는 느림의 실천. 넷째, 사회(정치)적 행위로 걷기.

송 씨는 드림로드 입구에 도착하기 전에 걷는사람들이 지향해온 사회적 행위 얘기를 먼저 꺼냈다.

"그냥 시작한 어떤 행동이나 약속들이 사회 인식을 바꾸고 정치적 행위로 표출되게 하면 좋을 텐데, 그런 표출을 위해 먼저 필요한 건 구성원(참여하는 사람들)과 소통해 인식을 전환하는 겁니다."

걷는사람들은 늘 보행권 고민은 하지만 최근 3~4년간 보행권과 관련한 행사가 주춤했다.

송 씨는 "걷는사람들은 한계가 있다. 너무나 자유로운 조직이다. 참여하라고 강제로 권하는 사람도 없고 회비를 내지도 않고 회장도 없다. 오고 싶으면 누구나 참여하면 된다. 그러다 보니 사회적 걷기가 잘 안 되는 것같다"고 털어놨다. 또 "제주 올레, 둘레길 걷기가 활발해지면서 걸으려는 사람들의 의미가 세분화됐고, 지역 사랑방을 넘어 인문학 자양분 공간이었던 시와자작나무가 2015년 문을 닫으면서 사회적 걷기가 미흡해진 측면이 있다"고 덧붙였다.

'걷는사람들' 인솔자이자 정예 멤버인 송창우 시인. /박일호 기자

그럼에도, 걷는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이유가 있다.

걷는사람들이 사회성을 가지려면 공감, 소통, 실천이 필수 요소다. 걷는사람들이 매달 걸으면서 대화하고 소통하고 공감하는 일은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실천은, 지역적으로 의미 있는 출판을 하는 등 조직적 실천이 필요한데, 자발적 실천이 따르지 않기에 지금은 딜레마에 빠져 있다. 하지만 새로운 세대와 소통하고 장애인이나 결혼이민자들이 걷는사람들에 동참하면서 화합·소통의 폭을 넓히는 역할을 하고 있다.

송 씨는 "사회성을 실천하려면 궁극적으로는 '사람'이다. 걷는사람들에 소수자들과 새로운 세대들이 많이 참여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처음엔 부모 따라 걸으러 왔다가 오늘 부모 없이 남매가 같이 왔고,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초등학생이 될 때까지 계속 걷고 있는 모습도 참 의미 있다"고 말했다.

걷는사람들이 걸을 장소를 결정하는 것은 정예 멤버들이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어디를, 어떻게, 얼마나, 어떤 이야깃거리가 있는 곳을 선택할 것인지 고민한다. 걷는사람들 카페(다음)에 장소를 공지하고 고정 회원들에게 이메일을 발송하면 매월 셋째 주 시간 되는 사람들이 걷는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카페 회원은 900명(전국 규모)이나 되지만 참여 인원은 30명 정도다.

이날 걷는 코스는 장복산 드림로드 입구에서 하늘마루까지 올라갔다가 진해 평화동으로 내려오는 여정이다. 약 3~4시간 걸릴 것으로 예상했다.

삼밀사 입구 덱(deck) 쉼터에서 잠시 쉬면서 참석자들에게 자기 소개 시간이 주어졌다. 창원에서 온 총각, 아빠 출장 가서 둘이서 온 남매, 송창우 시인 친구, 창동아지매, 캄보디아 여인과 곧 결혼할 총각, 김해 장유에서 온 녹색당원, 구산동에서 온 40대 부부, 해운동에서 온 매천 아지매,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함께 걸었던 여름이, 이 밖에 마산과 진동에서 온 여러 명이 자기만의 방식으로 동행자임을 알렸다.

서로 약간의 친밀감을 높이고 다시 걷기 시작하면서 길에 심어진 비목(손으로 잎을 비비면 레몬향이 난다)과 죽단화와 라일락 등 야생화, 드림로드의 사계절 풍경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이날 가장 시선을 끈 팀은 아빠와 항상 같이 오다가 둘만 참석한 남매였다. 어른들이 얘기하는 틈에 끼여 소통하는 모습이 기특했다. "걷는 거 힘들어요. 아빠가 가라고 해서 그냥 온 건데요"라고 중학생 오빠는 시큰둥하게 답변했지만 명랑쾌활한 표정이 묻어나는 걸 보니 그동안 계속 참여해온 초·중학생들의 또다른 걷는 즐거움이 보였다.

드림로드 중턱, 진해 앞바다가 내려다보이면서 왼쪽으로 자그마한 폭포가 흐르는 정자에서 점심 식사 잔치가 펼쳐졌다. 각자 도시락을 펼치니 김밥, 샌드위치, 과일, 매실주, 맥주 등 집집마다 각양각색 점심 메뉴가 쏟아져나왔다. 도시락을 싸오지 않아서 걱정했던 이들도 점심을 함께 나누며 금세 친해졌다. 중년 참석자가 많다 보니 자연스레 요즘 결혼 트렌드에 대한 찬성과 반대 의견들이 오갔고, 자유로운 대화 속에 날카로운 일침들이 끼어들며 소통의 공간을 마련해주었다.

하늘마루와 진해 평화동까지 함께 걷지 못하고 내려오면서 걷는사람들이 왜 16년간 끊임없이 걸을 수 있었는지 어렴풋이나마 알 듯했다. 딱딱한 토론회장에서 '왜 우리는 걷는가'라는 주제를 놓고 대화를 한다면 나오지 않을 가슴 깊숙이 자리한 속 이야기가 자연 속을 걸을 때는 쉽게 툭툭 내뱉어졌다.

송창우 씨가 헤어지기 전 한 말은 걷는사람들이 향하는 방향을 잘 압축해줬다. "숲 속에 둘레길을 만드는 것도 좋지만 원래 삶의 내용을 알 수 있는 리얼리티한 길이 필요합니다. 지역의 환경과 인물이 담긴 예전 길들이 없어지고 걷는 길이 획일화되는 것이 아쉽죠. 어딜 가도 편백나무 가로수가 심겨 있고 똑같은 꽃들이 피어 있다면 그건 이미 진정한 길이 아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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