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남지 않은 머리칼에 비녀를 꽂은 여든넷의 봄 처녀를 만나러 고향으로 향하는 길. 봄꽃은 바람에 날려 하늘로 갔다. 연초록의 아기들이 세상을 향해 소리를 지른다. 제법 따뜻해진 햇살에 짧은 소매 옷을 입은 이들이 늘어난다. 도심을 벗어나 반듯한 도로를 달려 시골길로 접어들자, 어느새 물 잡힌 논에는 파란 하늘 바다가 보인다. 논에 고인 물에 비친 산 능선이 마치 겨울잠을 마치고 나온 뱀처럼 휘어진다. 뱀이 쫓아오는 양 개굴개굴 우렁찬 소리가 지천을 덮는다. 노을이 지면 개구리들의 울음은 검은 바다의 별만큼 짙어진다. 개구리의 울음은 본격적인 벼농사를 알리는 신호탄이다.

집집마다 볍씨를 틔워 못자리를 만드는 풍경도, 모판에서 모를 쪄, 잘 두드려진 논에 힘차게 던지는 모습도, 줄맞춰 "허이, 허이, 줄 넘어간다"를 외치는 농부들의 노랫소리도 사라졌다. 중참을 내어오던 아낙도 사라졌다. 찌그러진 양은주전자의 막걸리에 "꼬시레('고수레'의 방언)" 소리도 사라졌다. 힘차게 돌아가는 기계가 논을 주름잡는다. 기술 발달로 벼농사도 수월해졌다. 온 동네 사람들이 힘을 맞춰 일해야 했지만, 이제는 혼자서도 너끈히 농사를 지을 수 있다. 그래도 아버지에서 아버지로 물려받은 논에 벼농사를 짓는 이들의 마음은 개구리 울음소리에 맞춰 춤춘다. 해마다 초심으로 돌아가 늘 같은 자리에서 일하는 농부들의 마음은 온통 논에 가 있다. 그렇게 우리 삶과 함께한 논이 줄었다.

한반도에 역사가 시작되면서 논은 우리 민족과 함께했다. 논은 우리 민족 최고의 삶의 터전이었다. 논은 어머님의 자궁처럼 생명의 근원이다. 자연환경을 보존해야 한다며 습지를 지키자는 소리가 드높다. 수자원을 지키자며 계곡을 막아 열심히 댐을 건설한다. 하지만 진정한 한반도 최대의 습지, 논을 지키고 농업을 지키자는 소리는 농부들의 공허한 외침이 되어버렸다. 소양강 댐 7배의 저수량을 자랑하는 논은 물의 저장고이자, 홍수 조절장치이다. 토양유실을 막으며, 맑은 지하수를 만든다. 논에서 자라는 벼는 공해로 찌든 공기를 정화시키며, 뜨거워지는 한반도의 기온을 조절한다. 어른이 되어서야 알게 된 논의 이점을 내버려두고도, 논은 시골 꼬마의 일기장 대부분을 차지한다. 논은 새카맣게 그을린 아이들의 최고 놀이터였고, 추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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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소중한 논을 지키는 농부의 고개는 숙여진 지 오래다. 농사가 잘 되지 않아 고개 숙이고, 풍년(이미 옛말처럼 들리지만)이 되어도 고민에 빠진다. 쌀 소비량이 많이 줄어 걱정이며, 수입쌀이 들어와서 걱정이다. 많은 사람이 이국적인 음식에 엄마의 맛을 잊어가고 있다. 엄마의 맛이 사라지면, 우리의 논도 사라진다. 그렇게 우리는 생명의 근원을 잃어가고 있다. 한반도 최대의 습지, 고요한 정적이 흐르는 논, 향긋하면서도 싱싱한 내음이 있는 논, 소곤소곤, 왁자지껄 수많은 생명의 삶이 있는 논, 초록 바다에서 황금 빛 노을이 물드는 논은 엄마의 자궁이다.

/장진석(아동문학가·작은도서관 다미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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