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은 바로 지금부터] (14) 창원 진북면 태가령분재원 이종복 씨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북면에서 태가령분재원을 운영하는 이종복(67) 씨. 보통 도시에서 직장생활을 접고 귀농한 여느 사람과는 좀 다르다. 도시에서 살다 농촌으로 들어갔으니 귀농이 맞지만, 그는 창원 도심에 살면서도 농장을 운영하며 분재를 기르고 낙농업을 했던 사람이다.

분재원 입구를 들어서자 수십 년의 세월을 간직했을 나무들이 자신의 크기에 맞는 화분을, 또는 땅을 차지하고 앉아 자태를 뽐내고 있다. 분재 사이사이로 이름 모를 야생초들이 봄기운을 받으며 한창 꽃잎을 피워내고 있다. 아들 내외와 함께 분재에 물을 주던 이종복 씨가 개 짖는 소리에 인기척을 느끼고 반갑게 맞는다.

◇저마다 수십 년 내공 간직한 600여 작품 = "안 그래도 어제 면사무소에 갔더니 직원들이 제 얘길 하고 있더라고요. 경남도민일보에서 귀농귀촌인을 추천해 달라고 해서 저를 이야기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제 이야기가 신문에 실릴만한 내용인지 모르겠네요." 이 씨는 지금껏 나무 가꾼 것 외에 별로 한 것이 없는데 무슨 얘깃거리가 있겠느냐며 손사래를 친다.

왜 얘깃거리가 없을까? 이곳에는 이 씨의 손길로 똬리를 튼 소사나무 소나무 등 분재가 600점이 넘는다는데 한 그루 한 그루 나무가 모양을 잡아가는 이야기만으로도 끝이 없지 싶다.

50년 동안 나무를 키우고 가꾸는 일을 해온 이종복 씨가 창원 진북면에 있는 자신의 분재원을 돌아보고 있다. /김구연 기자 sajin@idomin.com

◇열일곱에 시작한 분재 가꾸는 일 = 이 씨가 처음 농장을 시작한 역사는 5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7∼18세 때부터 나무 키우는 일과 축산업을 했다. 그러다가 축산업은 너무 힘이 들어 40대가 되기 전 그만뒀고, 분재 가꾸는 일은 지금까지 천직으로 알고 계속 하고 있단다.

"어릴 때부터 이 일이 적성에 맞았나 봅니다. 축산업과 분재를 같이했는데 끝까지 붙든 게 분재입니다. 옛날 마산 교방동과 석전동을 오가며 분재를 길러 제법 재산을 모았습니다. 그런데 보증이 문제였죠. 보증을 잘못 서 재산을 탕진하다시피 했습니다. 당시 석전동에 3층 건물이 있었고, 서성동에 2층 연립주택이 있었는데 모두 날려버렸죠. 그게 80년 1월이었을 겁니다."

이 씨는 다시 교방동에서 남의 땅을 빌려 분재를 시작했다. 열심히 일한 덕에 다시 형편도 나아졌다. 그런데 나무가 세력이 커지면서 교방동의 터가 좁아 규모를 키워야 했다. 그래서 우산동으로 이전했단다.

"우산동에서 동생 농장을 빌려 한 10년 정도 분재원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있던 자리가 기업 공장 터에 포함되면서 다시 이사를 해야 할 처지가 됐습니다. 갈 곳을 찾아다니다가 현재 이곳에 땅을 사 둔 게 있어 터전을 잡으려 했죠. 하지만 내가 꿈꾸던 관광농원을 하려면 땅을 더 사들여야 했는데 인근 땅을 팔지 않겠다고 해 다시 고성군 회화면까지 갔습니다. 하지만 그곳도 마찬가지였죠."

갈 곳을 정해야 했다. 고민 끝에 이 씨는 아내(61)에게 선택하라고 했단다. 아내는 고성보다는 마산에 가까운 이곳 진북면을 선택해 2000년께 집을 지어 이곳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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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소유물이지만 내 것일 수 없는 분재 = 이 씨의 분재 사랑은 남달랐다. 분재원에 종종 일본인이 찾아와 분재를 판매할 것을 요구했지만 그는 일본인에게 분재를 파는 일은 하지 않는다고 했다. 분재를 좋아하는 일본인에게 판매하면 더 많은 수익을 낼 수 있었겠지만 이 씨는 그럴 수 없었다고 했다.

"나무를 외국에 팔게 되면 내가 보고 싶을 때 그 나무를 볼 수 없게 됩니다. 좀 더 비싸게 팔았다고 하더라도 나무를 보려고 일본을 갔다 오려면 오히려 경비가 더 들어 안 파는 게 낫습니다."

다소 의아했다. 판 나무를 보려고 외국까지 가야 한다는 이야기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이 씨가 설명을 덧붙인다. "여기 있는 분재는 보통 27년에서 최고 35∼36년 된 것들입니다. 하루에 물을 두 번씩 줬는데 지금까지 몇 번을 줬겠습니까? 그렇게 정성들여 자식같이 키운 나무인데 얼마나 눈에 가물거리겠습니까? 우리나라 사람이 사게 되면 언제라도 내가 보고 싶을 때 가 보면 되지요. 그래서 일본 사람들에겐 안 판 것이었죠." 그제야 이해가 됐다. 하지만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하루는 대구 팔공산 밑에서 분재를 하는 곳을 갔습니다. 밑동이 큰 모과나무를 온실에 50∼60그루쯤 모아 두었더군요. 그래서 이 귀한 것을 어떻게 이렇게 모았을까 싶어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재미있는 사연을 들려주더라고요."

어떤 사람이 모과나무를 모아서 일본인에게 팔려고 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그걸 자신이 받아 키운다는 이야기였다. 이 씨는 그 말을 듣고 많은 것을 느꼈다고 했다. 뜻있는 이야기라고 여긴 이 씨는 자신의 분재도 일본에 넘겨서는 안 되겠더라고 했다. "내 것이지만 우리 국민 모두의 것이죠."

◇작년부터 마을 이장까지 맡아 농촌 계몽운동도 = 몇 년 전 나락 농사를 시작했다는 이 씨는 지난해 1월 마을 이장이 됐다. 새벽, 주민들이 경운기를 끌고 들녘으로 나가는 소리에 깨어나면 뭔가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농사를 하게 됐는데 이제는 이장까지 맡게 됐단다.

"여기서 생활하니 게을러질 수가 없어요. 더구나 동네 일을 맡다 보니 주민들이 짓는 농사를 알아야 어떤 이야기라도 해 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생각보다 농약의 위험성을 잘 모르는 것 같더라고요. 내가 먹을 채소며 곡식인데 인식전환이 필요하다 싶더군요. 그래서 한두 번 이야기한 것이 계몽운동처럼 됐네요. 올해는 진북농협에서 관심 있는 농민을 대상으로 교육을 해보라고 하더군요."

분재에서 시작해 농민이 된 이 씨. 이 씨는 과거 도회지에서 살 때와 비교해 마음이 제일 편하다고 했다. 남들이 고급 승용차에 멋진 옷을 입고 다니는 모습을 보면 나도 해봐야겠다는 욕심이 들 텐데 여기서는 그런 모습을 볼 수 없으니 마음이 편안하다는 것이다.

"시골 마을엔 아직 잔잔한 정이 남아 있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서로 얼굴을 안 볼 것처럼 싸웠던 사람들이 송아지가 우리를 뛰쳐나오면 내 일처럼 송아지를 잡아 우리로 돌려보내는 그들입니다. 갑자기 소나기라도 오면 언제 싸웠느냐는 듯 서로 마당에 널어둔 곡식들을 치워주는 인정이 있는 곳이죠. 나이가 들어 욕심 내려놓고 이렇게 사는 게 가장 재미있고 신나는 삶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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