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쟁이 시골 아줌마의 좌충우돌 산티아고 순례길] 14편

◇6월 30일 나헤라에서 그라뇽까지 28㎞

오늘은 짐을 부치고 걷기로 했습니다. 어제 놀 땐 모르겠더니 가슴도 뻐근하고(배낭 앞 끈을 너무 조여서인지) 무척 피곤하더라고요. 일단 완주가 목표이니 몸을 아껴주기로 하고 큰 배낭은 부치고 작은 배낭에 간식만 챙겼어요. 아침식사를 하는데 프랭크 부자, 켈리 모녀, 데레사도 내려왔고 여럿이서 함께 알베르게를 나왔어요.

어제 축제로 어마무시한 쓰레기로 가득한 시내를 빠져나와 그라뇽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이제 탄력이 붙었는지 다들 어찌나 빠른지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였어요. 함께 걷다 보면 용변 문제도 있고 다들 자기만의 페이스가 있기 때문에 무리 지어 걷기가 어려워져요. 저도 어느새 또 혼자 걷고 있네요. 오늘따라 더욱 아름답게 해가 뜨는 새벽에 음악을 들으며 걸으니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해집니다.

그라뇽 초입.

어제 미구엘 덕분에 슬럼프를 완전히 극복하고 새로운 자신감이 생기며 끝까지 걸을 수 있겠다는 확신이 생겼어요. 조울증 환자도 아닌데 며칠 사이에 기분이 심하게 왔다갔다하는 걸 보며 저 자신에게 헛웃음도 났어요. 오늘은 배낭도 가볍고 마음도 가볍고 천천히 여유 있게 흐르는 개울물에 발도 담그며 왔는데도 30여㎞를 6시간 정도 걷고 11시 좀 넘어서 그라뇽(Granon)에 도착했습니다. 배낭이 있었더라면 상황이 좀 달라지긴 했겠죠? (그라뇽에는 산 후안 바우티스타 교회에서 운영하는 알베르게가 유일하다.-편집자 주)

칼사다 성당.

도착을 하니 그곳의 호스피탈레로(hospitalero: 알베르게 운영자나 봉사자를 이렇게 부른답니다.)가 너무 격하게(?) 반겨줍니다. "오~ 코레아!" 하며 끌어안고 야단인데 술 냄새도 살짝 나는 게 좀 부담스럽더군요. 거기다 아직 제 배낭이 도착을 안 한 거예요. 갑자기 걱정이 되기 시작했어요. 거기에 짐이 다 들어있는데 잃어버리면 큰일이거든요.

'그것 봐~ 지고 가자고 했지? 오늘 거리도 멀고 해서 보내고 온 거잖아~!' 맘속에서 난리가 났어요. 약간 취한 호스피탈레로도 '잘 모르겠다' 그러고요, 또 한 명의 봉사자에게 물어도 '자기도 오늘 여기가 처음이니 기다려 봐라'고 하는데 답은 없더라고요.

알베르게에서 함께 밥먹고 정리하고.
알베르게에서 함께 밥먹고 정리하고.

일단 접수를 하는데 알베르게도 영 별로였어요. 성당에 딸려 있었는데 봉사자들이 운영을 하고 있었고 바닥에 매트리스를 깔고 쭉 누워 자는 형태로 되어 있더라고요. 좀 깨끗해 보이지도 않고요. 하지만 저는 순례자! 편하고 깨끗한 곳만 찾으려면 집에 그냥 있거나 호텔을 찾아야겠죠. 켈리 모녀는 먼저 와 반갑게 인사를 했고 조금 있으니 프랭크 부자, 앤도 이곳으로 들어오더군요. 약속이나 한 듯이요.

성당 앞에서 마주친 한국 학생.

◇매일 같은 일과, 매일 다른 느낌

아직 짐이 안 와서 씻지도 못하고 밖에서 초조히 기다리고 있으니 1시쯤 배낭이 도착했습니다. 에고~ 얼마나 반갑던지요. 앞으론 배낭을 보내지 않으리라 다짐도 해 봅니다.

씻고 살짝 낮잠을 자고 일어나 광장에 나가니 프랭크는 또 그림을 그리고 있네요. 피터도 옆에서 글을 쓰다가 저더러 앉으랍니다. 프랭크가 그동안 그렸던 그림을 보여주기에 화가인지 물었더니 화가가 아니고 건축사랍니다. 이제야 프랭크의 본 직업을 알게 된 거예요. 그림이 너무 멋지다고 칭찬해 주고 나도 그 근방에 앉아 일기를 썼어요.

내일은 어디까지 걸을 것인지 혼자서 궁리하다 보니 날마다 하는 일이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먹고 걷고 씻고 널고 일기 쓰고 내일 어디까지 갈 것인지 고민하고 자고, 정말 단순한 반복인 것 같은데 왜 이리 하루하루가 다른 느낌일까요? 참 신기하죠.

걷다가 만난 개울에서.

이곳에서 저녁 식사는 봉사자들이 와서 준비해 주고 순례자가 알아서 기부하는 형태로 운영을 하고 있었어요. 봉사자들의 모습이 아름다워 보이데요. 저도 식사 준비를 거들다가 미사가 있다고 해서 성당으로 갔어요. 미사를 하는 내내 눈물이 났어요.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만 눈물이 나는 거예요. 그간의 맘고생 때문에 제 풀에 서러웠던 모양이에요.

울음을 뚝 그치고 식당으로 갔어요. 혼자 온 분들도 많네요. 이 길에는 70대, 80대가 정말 많아요. 혼자이거나 부부가 함께 오지요. 오늘도 할아버지 같은 분들이 제법 보이네요. 한국 정서 같으면 힘든 일인데 참 부럽더군요. 그중에 빨간 티를 입은, 자기 집 앞에서 출발해서 석 달째 걷고 있다는 70세 이상은 거뜬히 되어 보이는 독일 할아버지가 인상적이었어요. 내 옆에 앉았었는데 친절하게 대해 주시더군요. 그렇게 크지 않은 알베르게라서 사람이 많지 않아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맛있는 저녁 식사를 했답니다. 식사 중에 봉사자들이 노래를 불러 주었는데 참 듣기가 좋았어요. 힘들 텐데 유쾌한 모습들이 보기 좋았지요.

식사 후 모두 힘을 합쳐 설거지를 하고 나니 밤 10시 가까이 되었네요. 술이 약간 취했던 봉사자가 우리를 성당 다락방으로 데려갔어요. 잘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촛불을 켜고 돌아가며 기도를 하게 하고 다들 포옹으로 끝을 맺었는데, 왠지 마음이 따뜻해지는 걸 느꼈습니다. 훈훈한 마음으로 내일은 20㎞ 정도만 걸을 예정이니 좀 늦잠을 자야겠다고 마음먹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글·사진 박미희

성당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박미희 씨.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