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말 현재 거리에 나와서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 청소년이 2만여명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이런 통계를 곧잘 비웃는다. 이 수치 역시 신고 접수된 것에 불과할 뿐이니까.

누가 이들에게 관심이 있는가? 가부장의 억압과 가난과 규율과의 투쟁을 포기하고 ‘독립’을 희망하며 거리로 나오지만 기다리는건 신선한 피를 기다리는 아수라계의 소굴 뿐이다.

최근에 영화 <눈물>이 세간에 화제가 되었다. 사실 <눈물>에 대한 화제는 영화를 만들기 시작할 때부터 이미 만들어져 왔다. ‘장선우 감독의 <나쁜 영화> 때문에 엎어졌다가 다시 시작한다’ ‘그래서 <나쁜 영화>에 버금가는 또 하나의 청소년 영화가 될 것이다’ ‘이것 역시 그들 속에 직접 들어가 찍는 방식이다’ 등등의 유포되던 입소문이 그것이다.

때문에 이미 이때부터 거리의 아이들은 또 하나의 극영화를 위한 홍보대상으로 이용되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럼에도 <눈물>에는 그들의 생활을(삶이 아니라 생활이다) 최대한 생생하게 그리려고 하는 노력은 담겨 있다. 그들이 세상을 향해서 등을 돌리는 방식, 즉 스스로를 한심하고 불쌍하고 구제불능인 상태로 방치하면서 친구들끼리는 나름대로 소통하려고 애쓰는 생활방식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나쁜 영화>를 극복하겠다고 나선 <눈물>은 이 지점에서 멈추고 만다.

결국 <눈물>을 바라보는 시선은 방관자의 그것을 넘어서기가 힘들다. 아니 오히려 십대들의 애정과 육체를 둘러싼 드라마의 요소가 강해지면서 ‘쟤네들이 언제 어떻게 화끈하게 한 판 벌일까?’하는 구경꾼으로 전락시키는 혐의도 있다.

따라서 <눈물>을 두고 청소년문제의 본질을 어떻게 드러냈느냐 아니냐 하는 논쟁을 벌일 필요도 없을 것이다. 다만 영화 <눈물>이 이 나라의 문화적 풍토와 현실을 가로질러 간 경위를 보면서 드는 생각 때문이다.

먼저 <눈물>을 둘러싼 이른바 문화인들과 그들이 관여하는 매체의 반응이다. 그들은 거의 비로소 생각난 듯이 이구동성으로 십대의 문제를 심각하게 들먹이기 시작했고, 감독 또한 거의 모든 지면에 얼굴을 내밀어 ‘왜 그들이 거리로 나가 그들만의 문화를 만드는지 문제제기를 해야한다’고 했다. 다 필요하고 맞는 얘기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들인 십대들은 <눈물>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관심이 별로 없는데도 관람불가시켰다) 특히 가리봉동의 주인공들은 아예 영화를 둘러싼 성찬에서 제외되었다.

끝까지 <눈물>은 ‘문제작’이었고, 단지 ‘거리의 십대들을 소재로 해서 조금 다른 얘기를 하고 싶었다’ 같은 고백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래서 <눈물> 이후에 변화된 것이 있다면, 영화에 나왔던 가짜 주인공들이 잘 나갈 수 있는 꿈의 대열에 한발짝 다가섰다는 것이고, 감독은 다음 작품을 별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변한 것은 이것 뿐이다. 공범자들에게는 여전히 책임으로부터 자유롭다. 다시 동어반복으로 제도를 조금 뒤집으면서 입으로 보호하고 선도하면 된다. 그러면서 또 합법적인 저임금으로 착취하면 되고, 그들을 소재로 진실한(?) 상품을 만들어 문화적으로 팔면 된다. 그래서 거리의 <눈물>을 외면하고 영화 <눈물>을 보며 위안을 삼을 수가 없다.

남은 것은 스스로가 범인임을 고백하는 일이며, ‘물 좋은 곳’과 ‘영계’를 찾는 미숙아들에게 족쇄를 채우는 일이다. 아직도 그들만의 ‘센터’는 허락되지 않으며, 거부의 세력들을 뒤집어 엎기 위한 문화적 투쟁 역시 뒷심이 딸린다.

이렇게 우리가 엉거주춤한 눈을 팔고 있는 사이, 원색 네온의 거리에선 새로운 피를 빨아들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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