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아너소사이어티 아름다운 나눔] (15) 김상길 대한민국상이군경회 이사·푸른노인전문병원 행정원장

"그동안 상이군경회 일을 하면서 그분들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면서 어느새 저도 노인이 됐네요. 허허 나 같은 노인을 위해…." 지난 2월 29일 72번째 회원으로 경남 아너소사이어티에 이름 올린 김상길(75) 대한상이군경회 이사. 그는 인터뷰 중 먼저 보낸 이들을 떠올리는 부분에서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나 인터뷰 대부분 밝은 분위기 속에 자주 웃음을 보였다. 그의 소탈한 웃음, 그리고 담담히 들려준 인생. '희망', '사랑', '애국' 이런 단어가 연상됐다.

◇조국에 바친 청춘 = 1961년 2월 김상길 이사는 하얀 제복을 입는다. 가정형편 등의 이유로 해군사관학교에 진학하게 된다.

"통영이 고향입니다. 통영초, 통영중, 통영고를 졸업하고 해군사관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원래는 서울대 공과대 쪽으로 진학하고 싶었습니다. 제가 2남 2녀 중 장남입니다. 아버지께서 일제 강점기에 여객선 기관사였는데 아주 부유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아버지께서 술병으로 돌아가셨어요. 제 나이 10살 때였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그를 둘러싼 환경도 조금씩 바뀌어 갔다.

"처음에는 아버지가 남긴 재산으로 버텼지만 그게 몇 년을 가겠어요. 어머니는 장사도 하고 돈을 벌려고 이리저리 고생을 하셨고…. 처음부터 가난했다면 모르지만 갑자기 그렇게 되니 몸도 마음도 참 힘들었어요."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965년 3월에 해병장교로 임관한 그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큰 사건과 마주하게 된다.

"66년 4월에 소대장으로 베트남전에 투입됐습니다. 낮에는 더위와, 밤에는 모기와 싸웁니다. 더 무서운 것은 전선이 없으니 적군이 어디 있는지 모르는 불안감이죠. 매번 정글을 수색, 정찰하고 매복하는 게 일인데 누군가가 총을 한 발 맞고 쓰러져야 적군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니…."

파병 7개월을 맞은 그해 11월, 그에게도 불행이 찾아온다. 퇴각해 휴식을 취하던 그는 적군이 쏜 총탄에 맞아 왼쪽 어깨 관통상을 당한다.

"나무그늘에서 쉬다 총에 맞았습니다. 한 50m 안 되는 거리에서 저격을 한 것인데 그 정도면 웬만하면 다 정확하게 맞히죠. 그런데 어깨에 맞아 살았으니…. 정말 운이 좋은 거죠. 그런데 뒷날 병원에 후송된 소대원이 펑펑 울면서 우리 소대 48명이 작전에 나가서 7명만 살아남았다는 거예요." 그는 말을 잇지 못했고 어느덧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그는 힘겨운 재활치료를 견뎌내고 1년간 미국 해병 기초반 정규교육을 이수하고자 유학을 떠난다. 하지만 교육을 받고 돌아온 그에게는 다시 베트남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69년 6월 그의 나이 스물아홉 살이었다.

"두 번째 명령을 받고는 고민이 많이 되더라고요. 군인 이전에 인간인지라. 허허. 전투하다 다쳤으니 그게 트라우마가 된 것 같아요. 그런데 군인정신으로 가기로 한 거죠.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이번에는 상황장교로 배치를 받아 비교적 힘들지 않게 많은 것을 배우고 왔죠. 그때 금성무공훈장, 은성무공훈장, 베트남 1등 명예훈장을 받았습니다."

◇새로운 인생길 그리고 운명 = 70년 6월. 그는 무사히 임무를 완수하고 귀국했지만 시련은 다시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부대 체육대회에서 배구를 하다 총상을 입은 곳을 다시 다쳤는데, 더는 군생활이 어렵다더군요. 그때가 73년도였는데 제 나이 서른세 살.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장군의 꿈도 물거품이 되고 앞으로 뭘 해서 먹고살아야 할까 하는 걱정까지 겹쳐 막막했죠. 참 힘든 시기였어요."

그러나 그는 금방 그 어려움을 딛고 일어선다.

"허탈했죠. 그런데 곰곰이 생각하니 지금 내 목숨은 덤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총 맞고 죽을 상황에서 살아났으니…. 그러면서부터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어요. 곧장 마산자유무역지역 무역회사에 취직하고 경남대 무역대학원에 다니면서 주경야독했죠. 한 4년 뒤에는 서울 무역회사에 스카우트돼 근무했습니다. 그때 참 잘나갔어요. 서울 소공동에서 잘나가던 무역 세일즈맨 100명 안에는 꼽히지 않았나 자부해 봅니다."

1979년께 2차 석유파동이 발생했고 다시 시련의 시기가 이어졌지만 그는 위기가 곧 기회라는 마음으로 사업체를 설립한다.

"일본 거래처 친구가 한 시간에 만두를 4000개 생산하는 기계를 소개해줬어요. 획기적인 기계였죠. 그래서 1980년 마흔 살에 창원 마산회원구 회성동에 동신식품을 세웠죠. 말 그대로 블루오션이었어요. 소문이 나면서 도내 웬만한 도내 대기업에는 다 납품을 했습니다."

김 이사는 회사가 자리를 잡고 형편이 나아지면서부터 상이군인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10년 뒤 그는 결국 사업을 접고 상이군경 복리 증진에만 매진하게 된다.

"대한상이군경회 경남지부장으로 취임해 15년 동안 일했습니다. 장기독재죠. 허허. 잘하고 싶은 욕심도 있었고 또 잘한다고 계속 시켜서요. 허허. 아무튼 재임 기간 정치권과 행정기관 쫓아다니면서 10억 원 넘는 예산을 따내서 지금 창원시 팔룡동에 경남도지부 복지회관을 건립했어요. 자랑 같지만 그런 활동도 봉사라고 김영삼 대통령 때 국민포장, 노무현 대통령 때 국민훈장 동백장을 주더군요."

◇덤으로 사는 삶, 아낌없이 = 그는 지난 2월 29일 상이군인 연금을 꼬박꼬박 모아 만든 1억 원을 경남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기탁했다. 하지만 이것은 일부분이었다. 김 이사는 2007년에는 재단을 설립, 창원 대원동에 푸른노인전문병원을 열었다. 스스로 가장 자부심을 느끼는 일이라고 평가했다.

"박종길이라고 제 가장 친한 친구가 있어요. 상이군인이면서 무공수훈자 회장을 하고 있습니다. 같이 사업을 하면서 번 돈을 투자해 병원을 열었습니다. 상이군인과 국가유공자를 위한 병원, 노인을 위한 병원입니다. 최근에는 남은 자산 70억∼80억 원가량을 병원 증설에 투자했습니다. 사회의 것, 재단의 것으로 환원한 거죠. 900병상으로 우리나라 노인병원으로서는 최고 규모라 보시면 됩니다. 곧 증축 개원합니다. 저는 행정원장이라는 직함만 받아서 보고만 받고 있습니다."

그는 이번 아너소사이어티 기부를 노인들을 돕겠다는 마음으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상이군경 하면 도움이 필요한 사람, 남들이 불편해하는 사람, 뭐 그런 인식이 있잖아요. 그런데 사실은 자신을 희생해 조국 근대화와 경제발전 초석이 된 이들이거든요. 처음에는 이런 부분을 알아줬으면 하는 생각이었죠. 그런데 어느덧 저도 노인이 돼 있더군요. 주변에 힘들게 사는 노인들이 참 많아요. 그런 분들에게 도움이 되려는 마음이죠. 물론 제가 기부한 돈으로는 많이 부족하죠. 그런데 나 하나라도 보태면 그것이 모여 더 많은 사람을 도울 힘이 되겠죠. 나이 든 내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애국심이라고 봐 주시면 더 고맙고요. 미국이라는 나라를 보면서 참 부러웠어요. 다민족이 함께 살면서도 나눔 문화가 확실하게 자리를 잡았잖아요. 나눔에 대한 명예도 존중해주고…. 우리나라는 단일 민족이라 그런 문화가 싹트면 더 잘할 수 있을 것이라 믿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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