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는 것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일을 보고, TV를 보고, 신문도 보고, 시장도 본다. 맛도 보고, 흉도 보고, 손해도 보고, 사주도 보고, 대소변까지도 본다. 이 '보다'는 말 속에는 눈으로 보는 것 외에도 여러 가지 뜻을 담고 있다. 동사 '보다'는 28가지의 뜻으로 쓰이는데, '무엇을 보다'에서 '무엇을'에 해당하는 것으로는 구체적인 것도 있고, 추상적인 것도 있다.

아서 아사 버거(Berger, Arthur Asa)는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라고도 했다. 예술가들에게 보는 것은 직관적이라는 것이다. 어떤 것을 봤을 때 생각을 거치지 않고 바로 파악하는 것이 직관이라면 미술가에게 보는 행위는 무엇일까? 미적 경험으로 보는 것이 옳은 것인지? 아니면 미술비평론의 시각으로 보는 것이 옳은 것인지? 스스로 매의 눈을 하고 자꾸 흠을 잡으려드는 것이 안타까워진다. 감성을 앞서는 이성적 판단이 중년의 삶을 건조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 건조한 봄을 변명하자면 예술품을 보는 것도 일종의 문화적 소비다. 그래서 소비에는 계획이 필요하듯이 예술을 파악하거나 예술작품을 관찰하는데도 방법론이 있는 것이다.

크게는 유미주의, 심리학주의, 사회학주의의 세 가지 방법이 있는데, 유미적 가치인 아름다움 그 자체를 최고의 것으로 보고 여기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는 태도의 일면과 심리적 퇴적물이 담긴 일면, 그리고 사회적 반영의 다른 일면으로 구성된 삼각기둥이다.

유미적 가치 면에서 보면 작품만이 그 대상이 되고, 심리학적 면에서는 작가만이 남게 되고, 사회학적 면에서는 시대성만이 나타나게 된다. 결국 삼각기둥이 유지되려면 세 개의 면을 동시에 염두에 두고 보아야 제대로 보는 것이다.

작가들은 자신이 보고 믿었던 메시지를 드러내기 위해서 예술적인 표현방식과 지극히 개인적인 작업방식을 혼용해 최종 결과물을 생산할 것이다. 그래서 작품은 작가의 주관과 감정을 시각화한 것이라고도 한다. 이 시각화는 결국 보는 것에서 비롯되어 보는 것을 요구하는 순환구조에 놓이게 되는데, 이 '보다(見)'라는 동사의 명사형이 '봄'이다.

암튼 또 봄이 왔다.

보는 계절이 온 것이다. 뽕나무 새순이 돋는 날임을 가리키는 한자 '춘(春)'의 어원이나, 삼라만상의 생기가 새로 솟아올라 온다는 뜻을 담은 영어 'Spring'의 어원이 자연의 변화를 담았다면, 우리말 '봄'의 어원은 불의 옛말 '블(火)'과 오다의 명사형인 '옴(來)'이 합하여 '불의 온기가 다가옴을 가리킨다'는 설과 '보다(見)'라는 동사의 명사형 '봄'에서 왔다는 설이 있는 걸 보면 우리는 아무래도 사람의 변화를 계절에 담은 것이 아닌가 싶다.

황무현.jpg
그래서 새봄에는 '새로 본다'는 말처럼 가슴이 두근거리는 새로운 세상을 보고 싶어진다. 

/황무현(조각가)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