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이 절정인 주말, 이 황홀을 시샘하듯 봄비 내린다. 가뜩이나 성급하게 지는 꽃이 이 비 한 번에 속절없이 다 떨어지지 않을까 괜한 조바심이 인다. 4월 어느 아침에 햇살 한 움큼에 일제히 피었다가 봄비 한 번에 소멸해버리는 벚꽃은 아쉽고 아름답다.

벚꽃의 개화와 낙화는 아름다움의 짧음, 짧음의 아름다움을 여지없이 보여준다. 유한성의 무한한 아름다움은 우리에게 많은 의미를 던진다. 어느 봄날, 만개한 나무 아래 서면 정일근 시인의 '사월에 걸려온 전화' 한 구절처럼 '우리 생애 사월 꽃 잔치 몇 번이나 남았을까 헤아려 보'게 된다. 유한성을 동반한 아름다움은 오히려 깊은 슬픔과 맞닿아 있다.

벚꽃 아래에 서면 아무리 부인하고 싶어도 결국 이 아름다움은 열흘을 넘기지 못하고 끝나리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지극히 필연적인 소멸에의 자각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해마다 그렇게 기를 쓰고 꽃구경에 나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긴 짧은 개화기가 어찌 벚꽃만의 일이랴. 일 년을 기다려 겨우 일주일을 세상과 만난다는 그 꽃처럼 어쩌면 우리의 삶도 긴 기다림과 짧은 개화, 그리고 낙화 뒤 또다시 기다림, 이 과정의 순환이 아닌가.

나이가 들어가면서 삶을 다른 눈으로 보게 된다. 이전에 절대로 용납되지 않던 것들이 그럴 수 있다고 받아들여진다. 딱 하나뿐이었던 결론, 한쪽만 보던 사시에서 벗어나 좀 너그러워지고 다양성을 인정하게 된다. 이전에는 피는 꽃만 예뻤지 지는 꽃의 아름다움은 몰랐다. 하지만 이제는 꽃 진 자리에 열매가 맺히고 그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그래서 피는 꽃은 피어서 예쁘고 지는 꽃은 또 지는 대로 예쁘다. 이전에는 개화의 순간만이 중요했지만 지금은 순환 과정 모두가 소중함을 받아들인다. 봄을 느낀 순간 순식간에 핀 듯한 그 꽃이 사실은 1년을 기다리며 한겨울 추위도 참고 견뎌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나는 생애 몇 번이나 꽃처럼 피어보았는가. 타인의 시선을 기준으로 생각한다면 한 번도 그렇게 화려하게 피어보지 못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봄날의 산과 들에 벚꽃만 피는 것은 아니지 않나. 몇 년 전, 식물원에 들러 꽃을 구경하면서 작은 깨달음을 하나 얻었다. 나의 눈을 사로잡는 것은 크고 화려한 꽃들이었지만 눈에 띄지 않는 소박한 꽃들도 오로지 제 빛깔과 향기로 의연히 존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갖지 못한 것에 목말라 시린 발을 동동 구르던 나는 왜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벚꽃, 장미가 되지 못하는지 아쉬워했지 내 빛깔과 향기로 꽃피울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꽃들 앞에서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날 이후 나는 날마다 나의 꽃을 피우고 있는지 스스로 묻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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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모습이 그렇게 달라 보이는 꽃들이지만 온 존재를 바쳐 핀 뒤에 어김없이 소멸을 맞고 아쉬움 없이 지는 점은 똑같다. 봄날 천지에 피어난 꽃들이 나에게 묻는다. 너는 어떤 빛깔, 어떤 모습으로 피었다가 어떻게 지고 싶으냐고.

/윤은주(수필가·한국독서교육개발원 연구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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