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쟁이 시골 아줌마의 좌충우돌 산티아고 순례길] 13편

오늘 날씨가 덥다고 해 아침도 안 먹고 출발을 했기 때문에 중간 중간 쉬며 요기를 했어요. 먹어야 힘이 생기니까요. 매일 걸으니까 먹어도 먹어도 허기가 지는 느낌이에요. 그런데 막상 먹으려면 많이 먹히지도 않아요, 지쳐서인지. 그래서 의무감으로 먹기도 하죠. 넓은 그라헤라 호수(Pantano de La Grajera) 옆에서 간식을 먹고 얼마를 더 가서 그라헤라 고개(Alto Grajera)를 지나는데 철조망에 수없이 많은 나무 십자가가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어요. 순례자들이 소망을 담아 십자가를 만들어 놓은 거예요. 난 십자가를 달지는 않았지만 모든 이의 소망이 이루어지길 마음속으로 기도하며 지나갔어요.

오늘도 여전히 쾌청한 날이네요. 가을 같은 하늘에다 노란 밀밭이 어우러져 멋진 풍경이지만 하도 보아서인지 이젠 감흥도 별로네요. 일찍 출발했기 천만다행이었어요. 땡볕이 너무 강렬해서 걷기가 힘이 들었거든요. 그래도 다행히 발은 물집이 생긴 후 더욱 신경을 써서 아침마다 꼼꼼히 바셀린도 바르고 자주 양말을 벗고 쉬어 줘서인지 더 심해지지는 않고 있어요.

나헤라(Najera)에 다 도착해 가는데 동네 입구에 사람들이 나와서 길가에 불을 피워놓고 고기를 구워 먹고 있더라고요. 동네 잔치 하나 보다 생각하며 시내로 들어섰는데 청소년들도 많이 나와서 왔다갔다하고 사람들도 많이 눈에 띄고 무척이나 생기가 넘치는 곳같이 느껴졌어요. 알베르게(순례자용 숙소)를 찾는다고 강 주변을 왔다갔다하는데 강 주변에도 많은 사람이 나와 아까처럼 고기를 굽고 있고 바들도 북적북적, 분명히 무슨 날임에 틀림이 없어요.

나헤라 초입에서 만난 주민들이 굽던 고기.

무슨 날인지는 나중에 알아보기로 하고 물어물어 알베르게를 찾았는데 아까 내가 지나온 곳에 있더라고요. 방에 들어가니 4명이 자는 방에 이미 3명이 들어 있었는데 엄마와 아들 둘 같았어요. 나에게 1층을 내주어서 얼마나 고마운지요. 이곳에선 2층에 자지 않는 것만도 행복하거든요. 침대에 걸터앉아 있지도 못하고 2층까지 오르내리며 짐 챙기고 하는 게 참 불편해요.

씻고 들어오니 아들 중 큰아들처럼 보이는 아이가 자꾸 말을 걸어왔어요. 고맙게도요.

스페인 사람이고 이름이 미구엘인데 17세라고 했어요. 알고 보니 이모와 함께 온 거였어요. 이모 이름은 로사고, 사촌동생은 엘도르인데 초등학교에 다닌대요. 이 가족은 일주일만 걸으러 온 거래요.

많은 이들이 시간이 날 때마다 이렇게 와서 걷고 가는 걸 봤어요. 꼭 생장에서 출발해 산티아고까지 걷는 것이 아니라 출발하는 시점도 다 다르고 본인들의 계획에 맞추어 와서 얼마큼씩 걷고 가는 거죠.

유럽의 어떤 사람들은 자기 집에서 걷기 시작해서 몇 달씩 걷는 일도 있어요.

이 가족은 정말 친절했어요. 특히 미구엘이요. 한국에 대해서도 물어보고 여러 가지 질문을 하는데 휴대전화 앱을 총동원하여 간신히 소통을 했어요.

제가 슈퍼에 간다고 하니 기꺼이 따라가 준대요. 저녁거리, 낼 아침거리, 간식을 챙겨 숙소로 오는데 미구엘이 짐도 들어주고 도와줘서 훨씬 힘이 덜 들더군요. 그 많다던 한국인도 만나기 어려워 반벙어리로 지내던 저에게 천사를 보내주셨어요. 이 길에서 천사를 세 번 만난다고 하던데(믿거나 말거나) 맨 처음 홀로 걷기 시작해야 하는 저에게 미국 언니가 천사로 다가왔고 두 번째 천사가 바로 미구엘이에요.

알고 보니 내일이 성베드로 축일이라서 축제를 3일이나 한다더라고요. 조금 있으니 어디서 음악 소리가 들려요. 창밖을 내다보니 도시 사람이 모두 나온 것 같았어요. 한 무리의 밴드가 똑같은 곡을 연주하며 다리를 건너오는데 손에 맥주나 음료를 든 사람들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춤을 추고 들썩이며 밴드의 앞뒤에서 즐기고 있었어요.

골목마다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이 가득하고.

나헤라가 축제의 도시라더니 성인 축일을 이렇게 성대하게 하는 줄 몰랐어요. 모든 사람이 나와서 축제를 즐기는 모습이 너무나 부러웠어요. 한국에 있는 우리 동네는 많지 않은 행사 중 가장 크다는 대보름 행사도 없어지고 있는데 이렇게 모두가 함께할 수 있는 축제가 많다는 것에 놀랍고 스페인 사람들의 열정이 정말 부러웠습니다.

넋을 놓고 난간에서 사진만 찍고 보고 있는데 미구엘이 축제에 가보지 않겠느냐고 제안을 했어요. 당근이지! 얼마나 나가고 싶었는데! 얼른 미구엘을 따라 내려오는데 프랭크랑 마주치자 미구엘이 같이 가자고 합니다. 프랭크도 오케이!

다른 사람 챙길 시간도 없이 사람들과 합류를 해서 우리도 신나게 춤을 추고 음악을 따라 흥얼거리며 축제를 즐겼습니다. 동네 스페인 아줌마들도 우리랑 팔짱을 끼며 동참을 환영했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주며 좋아해 주더라고요.

성베드로 축일 축제를 즐기는 나헤로 시민들.

물이 쏟아져서 위를 쳐다보니 2, 3층 난간에서 사람들이 내려다보며 물을 막 붓고 있었어요. 약간 취기도 있고 흥분한 사람들은 물을 더 부으라고 야단이고 그 모습에 '하하호호' 다들 즐거운 표정입니다. 그 행렬은 광장까지 이어졌고 그곳에서 콘서트도 열리고 있네요.

하지만 우린 순례자! 10시면 알베르게 문을 닫기 때문에 얼른 가서 저녁도 먹고 해야 해서 아쉬움을 뒤로한 채 행렬을 비집고 나와 숙소로 돌아왔답니다.

미구엘에게 내 휴대전화 번호와 이메일을 가르쳐 주며 한국에 꼭 오라고 했어요. 진심으로 고맙다고 인사를 했죠. 사 놨던 과일과 태극기 배지 두 개를 주니 너무 좋아했어요. 자신도 기회가 되면 한국에 꼭 오겠다고 약속을 했어요. 내일 아침이면 우린 새벽에 출발을 할 것이고 이젠 만나기가 어려울 것이기 때문에 아쉬워서인지 밖이 소란스러워서인지 너무 더워서인지 또 잠을 이룰 수가 없네요. /글·사진 박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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