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바람에 옷깃을 싸맸던 기억을 금세 잊어버렸다. 때론 소소리바람의 질투가 끝나진 않았지만, 길을 나서는 사람들은 노랑이며 분홍으로 한껏 치장을 한다. 찬바람을 피해 안으로 숨어들던 발걸음은 무대 위 춤꾼의 부드러운 발짓처럼 가볍다. 틈마다 고개를 쏙 내민 이름 모를 가녀린 생명들을 살피는 눈길이 따사롭다. 바람 따라 산들거리는 새싹이 사방에서 손짓한다. 고개만 돌려도 눈은 웃음 짓고 입은 노래한다. 자기보다 큰 가방을 둘러멘 초등학생의 얼굴에도 자연스레 꽃망울이 터진다. 이렇듯 찬바람이 지고나면 언제 곁에 왔는지도 모르게 희망의 바람이 무심히 우리를 찾는다.

길을 걷기에 좋은 날이다. 타박타박 살바람을 친구삼아 길을 나선다. 봄바람에 터져 나오는 꽃망울 같은 청춘이 부럽다. 주머니를 탈출해 손을 점령한 기계의 무심한 알림 소리는 온갖 봄을 알리는 소식으로 바쁘다. 늘 웃고 살며 행복한 모습을 전하는 이들이 부럽다. 부러우면 진다더니, 그만 지고 만다. 사차선 도로로 나서자, 굉음을 내며 바람을 가르는 자동차 소리, 강렬한 바퀴의 마찰음과 요란한 엔진소리가 귀를 어지럽힌다. 그러다 일순간 정적이 흐른다. 너무 급하게 가지 말라는 신호등의 붉은 손짓에 모두가 일순간 멈춘다. 바람도 잠시 멈춘다. 고요하다. 곧 이은 녹색 눈짓에, 혼탁한 바람이 사방에 어지러이 날린다. 왜바람 소리에 마음이 어지럽다. 궁금증이 인다. '공기의 흐름이 바람이라 하는데, 바람은 어디에서 시작될까? 하늘에서 시작해 바다를 건너 산을 넘어 오는 걸까? 아니지, 내가 숨을 쉬는 것도 공기의 흐름이니 나에게서 시작하는 건가?'

가만히 바람을 살피다보니, 소리가 들린다. 바람소리를 듣다보니, 나의 숨소리가 들린다. 숨을 마실 때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 뱃속으로, 폐 속으로 들어간 바람이 나의 온 몸과 마음을 돌아 나올 때, 비로소 소리가 난다. 나의 소리는 나의 바람이 밖을 향할 때 난다. 나의 소리는 나의 바람(희망)이다. 희한하게도 소리가 나를 향하지 않고 타인을 향한다. 어느 순간 나의 소리가 나의 바람을 타인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소리가 나를 향하지 않고 밖으로 향하기에 나의 소리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 그러기에 우리는 좋은 소리가 필요하다. 강력한 기계가 가르는 바람은 굉음(轟音)이요, 타인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바람은 비음(悲吟)이요, 세상을 탓하며 외치는 바람은 소음(少音)이요, 내 안의 헛된 나를 재촉하는 바람은 허음(虛音)이다. 나는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바람을 타인에게서 찾았는가? 진정한 나의 소리는 나의 바람이다. 이제는 나의 소리가 나를 향하길 바란다. 나의 바람은 나의 소리요, 그대의 바람은 그대의 소리다. 우리의 바람이 하나의 소리가 될 때 우리는 더욱 따뜻한 봄을 맞이한다.

/장진석(아동문학가·작은도서관 다미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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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바람 : 살을 파고드는 듯한 매서운 바람

*소소리바람 : 이른 봄에 부는 차가운 바람

*살바람 : 이른 봄에 부는 바람

*왜바람 : 일정한 방향 없이 사방에서 부는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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