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쟁이 시골 아줌마의 좌충우돌 산티아고 순례길 12편

◇6월 28일 로그로뇨까지 20.1㎞

사람들은 아침식사를 하는데, 난 어제 준비한 것이 없어 사과만 먹고 출발하는 팀을 기다렸어요. 마침 스페인 삼인방 팀이 출발을 합니다. 그래서 얼른 따라나섰지요. 아직 깜깜한 새벽이라 혼자 출발하기엔 무서웠거든요. 어제 내가 운 모습을 보아서인지, 또 둘이 다니다 혼자인 걸 알아서인지 다들 더욱 친절하게 대해주었어요. 나도 영어를 못하지만 스페인 대부분 사람은 영어가 전혀 안 되니 더욱 소통이 어렵긴 한데 마음만은 다 알겠더라고요.

마음이 어수선했지만 해가 떠오르는 모습을 보니 좀 차분해지는 것 같았어요. 새벽마다 해 뜨는 모습은 날마다 새롭게 다가오고 새벽 공기의 상쾌함을 가르며 걷는 기분은 무어라 표현하기 어려운 짜릿함이 있답니다. 다들 앉아 이것저것 나눠 먹으며 쉬고 있는데 시몬이 오더라고요. 저를 보자마자 '쏘리쏘리'하며 (지난밤 일로) 사과를 하는데 얼굴을 마주 보면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자리를 피했지요. 그녀 앞에서 울면 더욱 자존심이 상할 것 같았거든요.

그러는 바람에 어쩌다 보니 혼자 걷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더욱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어요. 로그로뇨에서 집으로 돌아갈 것인지 생각해 보니 '뭐야~! 누가 등 떠밀어 온 것도 아니잖아. 애초부터 미국 언니랑 함께 오기로 했던 것도 아니고. 원래대로 된 것뿐인데 이렇게 나약하면 어쩌겠다는 거야?' 갑자기 나 자신에게 미안하고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실패하고 돌아간다면 평생 후회를 할 게 뻔하잖아요.

활기 넘치는 일요일 오후. 로그로뇨 거리에서 펼쳐진 퍼레이드.

빵집에 들러 화장실도 가고 갓 구운 빵을 하나 사서 먹고 나니 힘든 마음이 누그러들면서 '그래~! 얼마나 큰 각오를 하고 왔는데 여기서 멈출 수는 없지. 다시 열심히 부딪쳐보자'는 생각이 들며 다리에 저절로 힘이 생겼답니다.

얼마나 씩씩하게 왔던지 11시도 안 되어 로그로뇨(Logrono)에 도착을 했지요. 카미노길에서 처음 만나는 큰 도시, 라 리오하 지방의 주도이며 포도주와 타파스(술에 곁들여 간단히 먹는 음식)가 유명한 로그로뇨입니다.

일단 가까운 알베르게로 들어갔습니다. 너무 일찍 도착해서인지 아직 큰 알베르게가 텅 비어 있었어요. 사립이라서 그런지 그래도 일찍부터 받아줘서 고맙더라고요. 공립 알베르게는 보통 1시에 문을 열어주기 때문에 배낭으로 줄을 세워놓고 기다리다가 문을 열면 그때야 들어갈 수가 있거든요. 맨 먼저 씻고 나오니 전에 생장의 알베르게에서 만났던 독일인 부부가 들어와 있네요.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는데 다리가 심하게 아프다고 호소를 하네요. 안쓰러움을 표현해 주는데 팬티만 입고 보여주는 거예요. 유럽 사람들은 다 그런 건 아니지만 훌러덩 잘 벗고다녀요. 남자들도 팬티만 입고 다니는 걸 수 없이 보았고 여자들도 속옷만 입고 다녀 민망할 때가 잦답니다. 이 아줌마도 속옷만 입고 있어도 스스럼이 없네요. 하하.

◇맛난 음식과 함께 되찾은 활력

씻고 나니 배가 고팠습니다. 시내로 나갔습니다. 이곳엔 타파스가 유명한 골목이 있다고 딸이 팁을 줬거든요. 물어물어 찾아가니 골목이 완전히 타파스만 파는 곳이었어요. 제가 찾은 집은 양송이 타파스 한 종류만 하는 집인데 아주 유명한 집이라고 하더군요. 저도 양송이 타파스와 와인 한 잔을 시켜 남들 따라 먹어 봤어요. 새우와 곁들여 나오는데 살짝 베어 무니 육즙이 주욱 나오며 맛이 괜찮았어요. 와인과 함께 먹으니 환상적이대요. 이 시골 아줌마가 이제 술꾼이 되어 가나 봐요. 걷고 나면 대낮부터 맥주 마시지 와인 마시지, 낮술은 아비 어미도 몰라본다던데 걱정이 되시죠? 하하하.

강을 끼고 있는 로그로뇨 초입.

그 집을 나와 다른 가게에서 다른 타파스 몇 개로 요기를 하고 숙소로 오는 길에 과일 견과류 등도 사서 돌아왔어요. 가게에 얼마나 다양한 게 많은지 사고 싶은 건 많았지만 이 길에서 욕심은 금물이죠. 알베르게로 오니 그새 사람들이 제법 들어와 있었어요. 오늘은 나도 시에스타를 즐겨 보렵니다. 아직 한 번도 낮잠을 안 잤었는데 어제의 일로 잠도 제대로 못 잤고 시간도 많고 또 피로가 누적되어 있어서 기분 좋게 한숨 자고 일어났답니다.

성당도 둘러보고 시내 구경도 하고 저녁도 먹을 겸 시내로 나가 보았습니다. 아까와는 다르게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시에스타 시간도 지났고 또 일요일이라서 더 그런 것인지 어디서 음악 소리도 쿵쾅쿵쾅, 활기가 넘쳤습니다. 그래도 먼저 성당을 둘러보았어요. 일요일이고 해서 미사가 있으면 미사를 드리려고 했는데, 한 성당에 들어가니 성시간(카톨릭성체 신심 행위로 예수님의 성심을 특별히 공경하는 기도시간)을 하고 있더군요.

아쉬운 대로 성체조배와 성시간을 마치고 다시 광장으로 나가 보니 쿵쾅거리는 곳은 에이즈 예방 퍼포먼스를 하는 거였고 벼룩시장도 서고 있고 애완견들을 모아 놓고 콘테스트도 하고 있고 그야말로 '웍더글덕더글' 사람 사는 곳 같았어요. 저도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구경을 하니 시간도 잘 가고 재미도 있어요. 마음에 드는 노천 바에 들어가 타파스, 빠에야로 식사를 하는데 일하는 사람들도 친절하고 맥주를 두 잔이나 먹었는데도 8유로, 참 착한 가격이네요. 숙소로 돌아와 빨래 개고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어요. 그런데 옆자리 아저씨가 1시부터 부스럭거리며 짐을 꾸리나 봐요. 좀 조용한가 싶더니 또 3시에 부스럭부스럭, '왜 그러세유 아저씨이~ 이건 매너가 아닌디유'라고 생각만 하다 살짝 잠이 들어버렸어요. 일찍 출발하려 마음먹었는데 아침식사도 안 하고 겨우 5시 30분 넘어서야 출발을 했답니다.

로그로뇨 시내 멋진 성당.
/글·사진 박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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