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9일은 날씨가 매섭게 찼다. 4년 만에 찾아온 2월 29일, 다른 해 같으면 3월의 첫날이었는데 강의차 찾아간 군부대는 산 아래에 있어서 그런지 마치 동화 속 욕심쟁이 거인의 뜰처럼 바람은 더 찼고 계절은 겨울로 역주행을 하는듯 했다.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도서관으로 향하는데 무엇인가가 나의 눈길을 딱 붙든다.

"어머나, 꽃이 피었네."

추위 속에 앙상하게 팔을 벌린 나무의 야윈 가지가 수줍은 듯 매화 송이를 피워내고 있었다. 나의 호들갑스러운 감탄에 안내하던 강 중사가 어쩐 일인지 해마다 그 나무가 가장 먼저 꽃을 피운다고 귀띔해준다. 이를테면 그 약한 꽃은 부대에서 봄의 전령사였던 셈이다. 작고 여린 꽃이 군인이라는 이름으로 젊은 시절의 매섭게 찬 한때를 견디고 있는 많은 청년에게도 또 한 해가 왔음을, 그래서 자신에게 주어진 국방이란 의무의 시간이 어김없이 가고 있음을 알려주는 시계 역할을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도서관에 들어서니 스물한두 살 나이 병사 스무 명 남짓이 기다리고 있었다. 창원도서관에서 재능기부 제의가 들어왔을 때 아들을 군대에 보낸 군인의 엄마로서 무엇인가 해야 되겠다는 마음으로 군부대 강의를 시작했다. 애초 4회, 단기로 시작했지만 1년의 시간을 훌쩍 넘긴 지금, 아들도 나도 아직 제대를 하지 못하고 있다.

첫 인사로 매화 이야기를 꺼냈다. 곁에 있어도 보지 못했던지 벌써 꽃이 피었냐는 표정들이다. 꽃이 아름다운 이유는 좁은 가지에서 견딘 기다림의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인다. 나의 아들도 군인이고 4월에 제대를 앞두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더니 제대로 몰입한다. 내가 그 병사들을 통해 나의 아들 생각을 한 것처럼 그 아이들도 나를 통해 집에서 기도하고 있을 엄마를 떠올렸으리라. 아이를 처음 군대 보내던 날, 21개월 뒤 2016년 4월이 오리라는 것이 거짓말 같았다. 하지만 이제 딱 한 달만 지나면 아이는 제대를 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것이다.

이성부 시인의 '봄'에는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는 구절이 있다. 매화가 좁은 가지에서 기다린 봄도, 아들들이 입대해 기다린 제대도 참으로 더딘 시간이었으리라. 마침내 봄은 오고 제대의 시간도 어김없이 오고 있다. 어김없다는 말이 때로는 말할 수 없는 위로가 된다.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은 순간도, 상황도 마침내 지나가고 어김없이 극복되는 순간은 온다.

강의 중 올 한 해 꼭 이뤄야 할 일 열 가지를 쓰게 했더니 한 병사가 '죽고 싶다는 생각 하지 않기'를 적어냈다. 겨울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는 스무 살 청년의 방황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누가 그렇게 적었는지 알지는 못했으나 그 상황에 꼭 맞는 글 한 편을 읽어주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부디 이 겨울을 잘 이겨내고 여윈 방황의 가지에 꽃 한 송이 피워내기를 바라는 마음을 전했다.

그렇게 차고 맵던 날씨가 겨우 1주일여 짧은 시간에 기온이 수직 상승했다. 그토록 앙상해 보이던 부대의 매화나무도 더 많은 꽃들을 풍성히 매달고 있지 않을까. 어김없음의 질서,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오고 마는 그 자연의 순리에 올봄, 나는 또 힘을 얻는다. /윤은주(수필가, 한국독서교육개발원 전임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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