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하던 언니와 헤어지고 오롯이 혼자 걷는 길, 외롭고 두려운데 예상 밖 사건도 잇따라 터지고

◇6월 27일 토레스 델 리오까지 29.1㎞ = 아직 어두운 에스테야를 뒤로하고 오늘 길을 재촉해 봅니다. 아침부터 생각이 많아지네요. 같이 길을 걷는 언니(재미교포)야 날짜가 느긋하니 급할 게 없지만 난 일정을 맞추려면 좀 빨리, 또 많이 걸어야 하는데 어제도 말할 기회를 놓쳐 버렸거든요.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이라체(Irache)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은 한쪽은 물, 한쪽은 포도주가 나오는 수도꼭지가 있어 마음껏 포도주를 마실 수 있는 곳으로 카미노에서 아주 유명한 곳이에요. 먼저 온 사람들이 왁자지껄하며 즐기고 있더라고요.

조금 가다 보니 길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곳이에요. 잠시 고민을 하다가 왼쪽 길을 택해서 갔답니다. 곧 산길로 이어지더군요. 언니도 그동안의 피로로 힘이 든 것 같아요. 힘들게 산길을 오르며 결심했어요. '그래! 오늘 이야기하자!' 마침 언니가 잠시 쉬어가자고 하기에 쉬면서 언니에게 말을 했어요. 더는 일정 때문에 늦을 수 없다고, 난 좀 더 빨리 가야 할 것 같다고. 언니는 당황하는 눈치였어요. 당연하죠. 언니도 늘 생각은 하고 있었겠지만 길을 가다가 말을 하니 어찌 당황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미리 말해봤자 더욱 심란하기만 하지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아 결심을 하게 된 거예요.

이라체 포도주가 나오는 수도꼭지.

언니와 끌어안고 인사를 나눈 후, 눈물이 나려는 걸 꾹 참으며 걷고 있는데 길에서 몇 번인가 마주친 스페인 삼인방을 만났어요. 언니의 안부를 묻는데 그때부터 눈물이 나기 시작했어요. 언니랑 헤어진 섭섭함과 함께 이젠 정말 혼자구나, 두렵기도 하고 말이 잘 안 통해서 외로울 걸 생각하니 자꾸자꾸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울고 있을 수는 없죠. 저는 다시 스틱을 바투 쥐고 더 열심히 걷기 시작했어요.

◇처음 혼자 걸으며 겪는 당황한 일들 = 그로부터도 7㎞ 정도를 쉬지도 못하고 걷는데 그늘 하나 없는 밀밭 샛길인데다가 발은 불이 난 것처럼 화닥거리고 체력은 완전 바닥이 나고 있었어요. 그때 나타난 마을이 산솔(Sansol), 알베르게 겸 바 앞에 앉아 발을 보니 드디어 내 발에도 물집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시원한 맥주로 갈증을 없앴죠. 여기서 묵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지만 제가 갈 곳까지 1㎞밖에 남지 않아서 양말 벗고 인터넷도 하고 점심도 먹으며 푹 쉬었어요. 그리고 약국이 있기에 들어가서 발을 보여 줬더니 무슨 연고와 물집에 바르는 테이프를 주는데 무려 16유로랍니다! 우이씨~! 하지만 할 수 없었어요. 거금을 들여 구입해서 다음 마을로 출발했는데 얼마 안 가니 저의 목적지 토레스 델 리오(Torres del Rio)가 나타났어요. 그런데 제가 묵으려 했던 알베르게가 꽉 찼대요. 제가 산솔에서 너무 오래 쉬었던 거예요. 하는 수 없이 다른 알베르게를 찾았는데 동네가 너무 작아 선택의 여지없이 하나 남은 낡은 알베르게에 묵을 수밖에 없었어요.

오아시스처럼 길가에 차려진 간이 바.

씻고 로비에서 발을 보니 물집이 심하지는 않은 것 같아 다행이네요. 물집 밴드 바르고 앉아 있으니 심란함이 몰려오네요. 언니 없이 맞는 알베르게의 첫날,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걱정이 태산이에요.

날씨는 덥지만 동네에 나가 보았어요. 동네는 아주 작았고 구경할 곳도 많이 없었는데 내일 출발해서 갈 길 쪽, 마을 끝에 가 보니 이 마을이 높아서인지 저 아래로 구릉과 함께 펼쳐지는 밀밭이 장관이었어요. 구불구불 길도 멋지고 여태까지도 밀밭은 수없이 많이 보아 왔지만 이렇게 예쁜 밀밭은 처음 봤어요. 숙소로 오다가 시몬(캐나다인) 아줌마를 만났어요. 낯선 동네에서 혼자 지내려는데 아는 얼굴을 만나니 정말 반갑더라고요. 용기를 냈죠. 저녁을 같이 먹겠느냐고요. 흔쾌히 그러자더라고요. 말이 안 통해 불편하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괜찮대요. 7시에 만나서 함께 밥을 먹으러 가기로 하고 헤어졌어요.

토레스 델 리오 초입 풍경.

사실 제가 굳이 30㎞ 가까이 걸어 이곳까지 온 것은 3월에 먼저 이 길을 걸었던 딸이 추천한 음식이 있어서였거든요. 스페인 전통 흑돼지, 도토리만 먹고 자란다는 '이베리코돼지'로 요리를 하는 건데 순례자들은 싼 가격에 먹을 수 있다고 꼭 먹어 보라고 했었어요. 7시에 시몬이 묵는 알베르게 앞으로 갔습니다. 시몬이 나왔고 식당으로 가려는데 갑자기 시몬이 소개해 줄 사람이 있다는 거예요. 시몬을 기다리며 잠깐 동양인 같기도 하고 동남아인 같기도 한 사람이 장황하게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보긴 했는데 그 사람이 한국인이라는 거예요. 망설일 틈도 없이 인사를 했고 그 사람이 반갑다며 끌어안는데 악취가 훅 나더라고요. 거기다 맨발에 옷은 방랑자(?) 차림을 했어요. 저도 반갑다며 인사를 하고 나니 시몬이 함께 밥을 먹자더군요.(저는 그렇게 알아들었어요.) 그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 중이었는데도 그러겠다고 해요. 난 사실 미리 약속도 했고 해서 그러고 싶지는 않았지만 얼떨결에 그러자고 했는데 알고 보니 우리 둘이 먹으라는 거였어요. 시몬에게 같이 가도 된다고 말을 했는데 못 알아들은 건지 안 가고 싶은 건지 둘이만 가래요. 우와~! 엄청나게 황당하게 되어버렸어요.

◇결국 울음으로 마무리한 하루 = 희한한 모습을 한 악취 나는 사람과 졸지에 앉아 음식을 먹으려니 시몬이 원망스럽고 무시당한 것 같기도 해서 엄청 속이 상했어요. 그래도 최대한 표시 안 내려고 건배도 하고 이야기도 조금 나누며 식사를 하는데 얼른 이 자리에서 나가고만 싶어졌어요. 식사 후 이 사람은 자기 음식값을 계산할 의지도 없더라고요. 내가 계산한 후 먼저 가시라고 인사하고는 시몬에게 갔어요. "시몬~! 땡!큐!" 하고는 휙 돌아서 오는데 너무너무 눈물이 나는 거예요. 그렇지 않아도 언니랑 헤어져서 섭섭하고 외로운 날, 물집도 생겼지, 알베르게도 열악하지, 거기다 알지도 못하는 원치 않는 사람과 식사를 하고 돈까지 내주다니.

길가에 주저앉아 울어버렸네

식당에서 나와 저쪽에 있는 성당마당에 가서 혼자 엉엉 울었어요. '그래~! 내가 역시나 무모했어! 이렇게 부족한데 카미노를 걷겠다고? 이젠 더 못 걸을 것 같아, 집에 돌아갈 거야! 말도 안 통하고 도저히 안 되겠어! 그래~! 이만하면 됐어, 이 외로움 견디며 끝까지 완주하기는 어려울 거야! 여기선 교통이 불편하니 내일 하루만 더 걷자. 로그로뇨에 가면 무슨 해결책이 생기겠지~.' 엉엉 울고 나니 속이 좀 시원해져서 숙소로 돌아왔어요. 와보니 스페인 삼인방도 같은 숙소고 몇몇 아는 얼굴들이 인사를 하는데 난 퉁퉁 부은 얼굴로 겨우 살짝 웃어 줄 수밖에 없었답니다. /글·사진 박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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