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 지난 유행가 가사 중에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를 붙이면 남이' 된다는 구절이 있다. 그 가사를 들을 때마다 꽤 그럴듯하다는 생각을 한다. 단순히 획 하나, 자모의 작은 차이 하나가 엄청난 뜻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많은 경우를 보며 쉽게 바뀌는 말의 뜻처럼 현실의 상황도 그렇듯 단순하게 바뀌면 얼마나 좋을까 헛된 기대를 가져보는 경우가 있다.

우리가 살면서 가장 흔히 가지는 의문 중 하나는 '왜 사는가?'하는 것이다. 정말 답을 알 수 없는 이 물음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고민해왔고 앞으로도 고민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질문은 옳지 않다고 본다. 태어났으니, 나에게 한세상을 살라는 운명이 주어졌으니 살아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삶에 대한 더 근본적인 질문은 '어떻게 살 것인가?'가 더 맞는 듯하다.

나는 자신을 꽤 낙천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았다. 별 재주도, 크게 가진 것도 없지만 남들 가진 것을 부러워하기보다 자족의 행복을 누리며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우리의 삶이 어디서 어떻게 비롯돼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 수 없는 것이 무기력한 인생이지만 적어도 지금 내 앞의 생을 행복하게 바라보고 살아낼 수는 있지 않나. 하지만 이런 생각이 지나친 오만일 수 있음을 지난 몇 개월 동안 절감하며 보냈다.

'불행은 혼자 찾아오지 않는다'는 말처럼 삶에 예기치 않은 여러 가지 일이 한꺼번에 찾아들었다. 평온하고 고만고만하던 일상이 갑자기 균형을 잃고 기우뚱거리자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거렸다. 절망의 심연을 지나며 나는 그동안 얼마나 말로만 희망을 외치던 사람이었는지 아프게 깨달아야 했다. 독서 강의 시간에 만난 많은 사람에게 말했던 희망이라는 것이 사실은 오만한 자기과시는 아니었나 싶은 생각에 괴로웠다. 그동안 축제라 여기던 삶은 순식간에 무겁고 힘든 숙제가 되었다.오늘 말간 햇살 아래 마음 밑바닥을 들여다본다. 아직도 터널을 완전히 통과하진 못했지만 이제 가장 깊은 어둠은 지난 듯하다. 이 시간이 끝이 막힌 동굴이 아니라 조금만 더 앞으로 나가면 환한 빛에 눈부실 새로운 길이 열릴 것임을 믿는다. 겁쟁이 엄마, 울보 아내, 찌질한 형제를 잘 견뎌준 가족들, 어려울 때마다 힘들 때마다 기꺼이 조언자가 되어준 좋은 친구, 펼쳐 읽을 때 말할 수 없는 위로가 되어준 책들, 모두모두 내편이었다. 힘들다 여겼던 순간들도 사실은 앞으로 더 늙어서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이 아닐까? 삶이 위대한 이유는 예고 없이 닥쳐오는 그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기 때문이라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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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에 올라온 지인들의 소식에 봄에 대한 설레는 기대들이 많다. 이제 곧 봄이 오고 나의 겨울도 끝이 나겠지. 한 번의 겨울을 지냈다고 해서 내 삶에 겨울이 다시 오지 않으랴만 나는 오늘 '숙제'의 'ㅅ'을 빼고 그 자리에 'ㅊ'을 끼워 넣는다. 친구의 말대로 두 번만 살 수 있어도 여유가 있을텐데 딱 한 번 사는 삶을 못다 한 숙제로 무겁게 보내고 싶지는 않다. 숙제라는 글자에 자음 하나를 살짝 바꾼 자리 설렘이 새싹처럼 돋아날 듯하다.

/윤은주(수필가·한국 독서교육개발원 전임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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