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비춤]영호남 맞닿은 지리적 위치 뱃길로 농수산물 모으며 성장
교통망 발달에 쇠락의 길 걷다 '화개장터' 인기에 2001년 복원

'언덕엔 소와 말이 서로 얼려 희롱하고, 포구엔 돛단배들이 엮은 듯이 총총하네. 서쪽은 남원이요 북쪽은 상주라 크고 많은 장꾼들 떼 지어 모여드네. 송경 중국비단이 거쳐서 들어오고 울릉·탐라 생선도 이곳으로 수입되네.'

다산 정약용 선생이 화개장의 풍경을 읊은 시의 일부다.

당시 5일장(1일, 6일)이었던 화개장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다산 선생의 시로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조선 후기 가장 번성했던 화개장은 진주장, 김천장과 함께 영남 3대 시장으로 꼽혔고, 일제강점기를 벗어나기 이전까지 전국 7대 시장 중 하나로 알려질 정도로 큰 시장이었다고 전해진다.

화개장이 5일장으로 크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섬진강을 낀데다 경남과 전남 두 지역 경계지점에 있는 지형적인 덕택 때문이었다.

도로가 발달하지 않았던 조선시대 에는 한꺼번에 대량의 물자를 운반하려면 육로보다는 배를 통한 수로가 유리했다.

옛 시장터에 있는 화개장터 비석./박일호 기자 iris15@idomin.com

더불어 화개는 경남과 전남 경계지점에 있어 여러 지역 수산물과 농산물이 쉽게 모였다가 흩어질 수 있었다.

〈하동군지〉는 뱃길이 화개장까지 닿아 남해·여수·거제· 삼천포 등 남해안 해산물이 실려와 하동·구례·남원·함양 등지 내륙지방 농산물·임산물과 교환됐다고 적고 있다.

또한 소금이나 생선 등 해산물은 화개장을 거쳐 보부상에 의해 영남내륙은 장터목으로, 전라도 내륙과 충청도 등지는 벽소령과 화개재를 통해 이동했다고 한다.

이처럼 화개장 번성 시기는 이중환의 〈택리지〉나 다산 선생의 시 등 일부 기록에 남아 후대에 전해지고 있으나 조선 후기 이전 기록이 거의 없다 보니 화개장이 시작된 유래나 초창기 모습은 알 길이 없다.

다만 자연적으로 발생했다가 15세기 중엽 5일장 제도가 생기면서 그 이후 5일장 형태를 갖춘 화개장이 시작됐을 것으로 추측만 할 뿐이다.

번성하던 화개장도 교통망 발달과 유통구조 근대화 등으로 일제강점기 이후 차츰 쇠락의 길을 걷다가 1970년대 이후 명맥만 겨우 유지하게 된다.

화개장터 바로 인근에서 태어나 자란 토박이 배채협(71) 어르신은 어린 시절 어른들에게 들었던 화개장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아버지 때 얘기를 들었는데, 일제강점기 이전까지 남해를 거쳐서 화개 나루까지 일본이나 중국 무역선이 물건을 싣고 이쪽으로 올라왔다고 그랬어. 지금 사는 집이 그때 소금창고였어. 원래 배가 구례 토지까지 올라갔었는데 자꾸 섬진강 수심이 낮아지니까 화개까지만 갈 수밖에 없었지. 그래서 화개장이 발달한 거야. 그때는 차가 없으니까 상인들이 짐을 짊어지고 지리산 벽소령 고개를 올라서 함양, 임실, 전라북도까지 가기도 했지. 내가 어릴 때 화개장은 보잘것없었어. 지금보다 규모가 훨씬 작았지. 한국전쟁 터지면서 10년간 장이 없어졌다가 60년대인가 다시 장이 섰는데, 교통이 발달하니까 여기까지 올 필요가 없어서 안 되는 거야."

화개장터가 지금 모습처럼 복원된 것은 15년 전으로 가수 조영남 씨가 부른 '화개장터'가 뜨면서 계기가 됐다. '화개장터' 노래 때문에 전국 각지에서 관광객이 몰렸으나 당시 화개장터는 보잘것없을 정도로 초라해 실망감을 안겨줬다.

이 때문에 하동군은 화개장터 명성을 되살리고자 복원 사업을 추진했고, 지난 2001년 봄 화개장터가 개장했다. 복원된 현재 터는 옛 화개장터가 있었던 장소가 아니다.

옛 터는 현재 화개장터 뒤편에 있는 화개천 건너 맞은편이다.

당시 복원 사업에 관여했던 문화관광실 김병수 계장은 "복원 사업을 추진할 때 옛 화개장터는 상인 20여 명 만 들어갈 정도로 너무 좁은데다 주위에 건물이 들어서 있어서 논이었던 현 장소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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