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할머니의 '70세 이후' 죽음·후회 넘어선 이야기들 <어떻게 늙을까>

온 가족이 둘러 모여 그동안의 안부를 묻고 앞날을 염려하고 격려해주는 명절이다. 노쇠하신 어르신과 노후를 대비해야 할 중장년, 그리고 청춘들까지 모인 자리. 인생에 대해 나이 듦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면 <어떻게 늙을까>를 추천한다.

75세로 은퇴하기 전까지 영국의 한 출판사에서 50년 가까이 편집자로 일한 다이애너 애실(99)이 90세에 쓴 회고록 <어떻게 늙을까>는 노년의 삶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솔직하다. 노인을 미화하지도 불쌍하게 여기지도 않는다.

그녀는 "인생이 개체 단위가 아니라 종족 단위로 돌아간다는 건 너무 분명한 사실이다. (중략) 하지만 그동안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시들어가는 노년기를 성장기보다 늘이려 애써왔다. 그러니 노년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그리고 노년은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생각해 보는 게 좋지 않을까. 청춘에 관한 책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출산같이 힘들고 복잡하기 짝이 없는 경험을 다룬 책들도 갈수록 쏟아져 나오는데 저물어가는 노년을 다룬 책은 별로 없다"고 말하며 '내가 그런 책을 한번 써보자'고 마음먹었다.

<어떻게 늙을까〉 다이애너 애실 지음·노상미 옮김

책은 노년을 위한 자기계발서이거나 한 편집자의 위대한 삶을 다룬 자서전, 인생에 대한 진지한 철학서가 아니다.

저자가 만났던 책과 남자 이야기. 70세 이후 있었던 몇 가지 일을 이야기하며 자신의 연애관과 가치관을 수다 떨듯 풀어놓는다.

애실은 자신보다 먼저 죽음을 맞은 가족과 친구를 보며 '죽음이란 수선 피울 일이 아니야'라고 말한다.

그녀가 죽음에 대해 이러한 태도를 보인 가장 큰 이유는 영안실 방문이었다. 시신을 싣고 내리는 남자들을 보며 죽음이란 그 과정이 아무리 끔찍하다 해도 아주 일상적인 사건임을 깨닫는다. 죽음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그렇게 할 수 없는 일에 가깝다고.

다만 죽음이 다가왔을 때 입는 육체적 타격 같은 두려움이 아니라 아무리 가졌어도 충분치 못했던 것에 작별을 고해야 한다는 사실에서 슬픔을 느낀다.

대부분 사람이 제 나이를 잊고 살 듯 애실도 60대 내내 중년 언저리라고 느꼈다. 그녀는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도 낳지 않았다. 몸이 따라줄 때까지 연애와 성관계를 즐겼다.

하지만 일흔한 번째 생일이 되자 결국 바뀌었다. 늙은 게 뭔지 여러모로 따져보고 헤아려볼 때라고 여겼고 성욕이 서서히 사라지고 더는 성(性)적인 존재가 아닌 뒤에야 자신을 명료하게 바라보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렇다면 그녀는 말년의 삶을 어떻게 보내고 있을까?

인간관계도 중요하지만 활동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애실. 늙어 배운 그림이 준 기쁨이 컸고 정원 가꾸기, 운전하기를 즐긴다.

특히 정원을 꾸미는 것은 뼈마디가 쑤시지만 땅속에 두 손을 넣고 식물 뿌리를 편안하게 펴주는 건 정신을 온전히 쏟을 수 있는 일이라 나 자신이 내가 하는 일 자체가 되어 자의식으로부터 놀라운 해방감을 경험하게 된다고 했다.

나이가 들면서 소설에 흥미를 잃었고 연인을 원하지 않게 되었지만 자신이 해온 일에 대한 호평이 더 벅차고 이젠 마음 깊이 어떤 것도 중요치 않다는 느낌, 스스로 더는 수줍음 때문에 고생하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은 늙어서 얻는 이득이라고 했다.

그녀는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누구든 여든아홉 해를 돌아본다면 후회로 점철된 풍경을 보아야만 하는 듯하지만 시야에 보이는 것은 이제 현재를 살아나가는 일에 집중해도 누가 뭐라고 하지 않을 나이에 이르렀다고.

인생이 행운이든 불운이든 양극단으로의 치우침이라기보다 부침의 문제이고 대개는 시작점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 멈추는 듯하다고 말한다.

애실은 회고록이 어떤 이들에게는 전혀 와 닿지 않거나 거슬릴 수 있다고 인정한다. 오로지 '운 좋은' 사람을 향해서만 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 하지만 우리가 누리거나 시달리는 운은 오직 외부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타고난 회복력인 것 같다고 조언해준다.

"좋아, 몰라도 괜찮아"라는 말을 남기고 싶다는 저자.

책장을 넘길 때마다 백발의 수다쟁이 할머니가 연상된다. 한없이 유쾌하고 재밌다. 늙었기 때문에 대접받으려는 꼰대도 젊은이들에게 징징대는 것도 없다. 스스로 운이 좋다고 말하고 자만심도 적당히 있는 영국 할머니 그 자체다. 그러면서 행간 속에 지혜가 듬뿍 담겼다.

책은 '2008 코스타 문학상', '2009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을 수상했다. 225쪽. 뮤진트리. 1만 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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