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정의에 민감할 때 역사가 발전…높은 자리에서 내려와 촛불 밝혀야

저는 목사이지만 교회를 섬기는 목사만이 아니라 현실 문제에도 참여하는 목사입니다. 제가 1984년에 이 지역에 왔으니 30년 넘게 이 지역에서 나라 일이나 지역 일에 관여한 셈인데 이제는 이 지역에서 운동깨나 하는 사람이면 거의 알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런 저를 보고 목회나 하지 쓸데없는 짓한다고 핀잔을 주는 사람들도 있지만 저도 두 가지 일을 하느라 가랑이가 찢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술 취한 자가 만원버스를 몰고 있고, 강도 만난 자가 사경을 헤매고 있는데 하늘만 쳐다볼 수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내가 나서서 대단한 일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선과 진실과 정의가 엉켜있는 곳에서 나 자신을 정화할 수 있었습니다.

가끔씩 만나는 사람들의 속마음을 꿰뚫을 수는 없지만 내가 내 양심을 이기지 못하고 거리로 나온 것처럼 그들도 뭔가 빚진 심정이 있었기 때문에 함께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런 사람들조차도 점점 줄어가는 것 같아 안타까움이 많습니다. 숫자가 전부는 아닌데, 선과 진실과 정의가 숫자가 아닌데 하면서도 때로는 힘이 빠질 때가 많았습니다. 이전에는 그래도 대학생들과 청년들이 앞장을 서서 분위기를 돋웠는데 지금은 그들이 있었던 자리가 큰 구멍으로 남아 더 더욱 마음이 아립니다. 그러나 잠깐 태양이 구름에 가려있을 뿐이지 태양이 없어진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언제나 진실이 문제이지 작은 촛불이 문제가 된 적은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역사가 발전한다는 것 자체가 기적 같은 일이지만 그렇다고 이 일이 나와 무관한 일입니까? 선과 진실과 정의가 나와는 상관없는 일입니까? 나라가 먼저가 아니라 내가 먼저입니다. 내가 선과 진실과 정의에 민감할 때 너도, 국가도 민감할 수 있는 것이지 내가 민감하지 못하면 누구도 민감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이 나라의 민주화와 통일조차도 잘 살게 되면 저절로 해결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가장 위험하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잘사는 것에 민감하려면 선과 진실과 정의에는 무감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가난해도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깊이와 무게 속에서 선과 진실과 정의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어떻게 해야 선하고 진실되고 정의로울 수 있습니까? 제가 제안하고 싶은 것은 지금 서 있는 높은 자리에서 내려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고통과 눈물과 울부짖음이 있는 낮은 자리를 모두가 기피하려고 하지만 그 자리가 나를 구원하는 자리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을 포기하시고 죄 많은 사람 속으로 내려오신 것이 구원이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 모든 것들이 몽쳐 있는 곳이 작은 촛불이 켜지는 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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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이들은 제쳐 두더라도 진실로 이 땅에 선과 진실과 정의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촛불이 밝혀지는 자리로 나오기를 바라고 그 자리에서 맑고 깨끗하고 진실한 것들을 호흡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물론 이러한 일이 다시 태어나는 일처럼 어려울지 몰라도 빛이 커지는 것과 함께 새 역사는 시작될 것이고 악과 거짓과 불의는 힘을 잃게 될 것입니다.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습니다.(요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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