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하지 않게 서울을 다녀올 일이 생겼다. 지방에서는 쉽지 않은 행차다. 그래서 겸사로 경기도 인근과 태안반도 일대까지 여행하고 왔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서울은 단연 북촌방향이다. 광화문 뒤의 그 공간들은 뭐랄까, 조밀조밀한 공간들에 집들이 다닥다닥 이어붙어 있는 모양새가 상당히 감각적이다. 키 큰 가로수 덕분에 더욱 높아 보이는 하늘을 바라보며 걷는 삼청동 길은 언제나 '새끈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왠지 모르게 땅의 기운이 좋았던 듯싶다. 그래서 그곳은 예술가들이 기꺼이 거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또 점쟁이 집들도 간혹 눈에 들어왔다. 그곳은 그렇게 어떤 사람들을, 어떤 느낌들을 자꾸만 모이게 한다.

게다가 한 사년 전쯤 마지막 그 동네 방문 때 짓기 시작하던 국립현대미술관의 서울지점이 개관까지 해서 내가 좋아하는 영화작가 특별전도 열고 있는 게 아닌가. 마침 갑자기 생긴 서울 일도 광화문 청계천 쪽이라 생일 선물을 한꺼번에 많이 받은 아이처럼 나는 한동안 붕 떠 있었다. 아마도 몇 달은 갈 것 같다. 이 충만감이 사라지기 전에 맘껏 즐겨야지.

감성도 암기과목인가. 벌써 여행에서 얻은 느낌이 지금은 반 이상 날아가고 없다. 아무래도 느낌과 감정이란 기억과는 다른 방식으로 쟁여두어야 하는 것인 듯싶다. 나이가 들수록 웬만한 자극과 충격에도 나른하고 또 의연해져 버리는 것이 못내 서글프다. 화재로 번질까봐 꽁꽁 싸매두었던 마음속 불꽃들이 하나둘씩 사그라져만 가는 것과 불편한 힐의 부츠를 벗고 편한 단화 한 켤레를 사는 마음이 동무한다.

그렇게 신발을 갈아 신고 다음 날은 경기도 수원과 태안반도를 쭉 돌아봤다. 수원 화성과 근처 서해의 제부도는 십칠 년여 만이다. 과거와 사뭇 달라진 광경은 옛 기억과 함께 양파껍질처럼 계속 포개지고 겹으로 쌓인다. 아주 나이가 들어 거동이 힘들면 그 껍질들의 내 마음을 다시 여행하며 살겠지. 그때 그 기억에 고인 내 느낌과 감정까지도 오롯이 떠올라야 할 텐데. 어떤 자루에 잘 담아두면 사라지지 않을 수 있을까. 의지는 약해지고 집착은 강해져만 간다.

그렇게 하나둘 채우려고만 하는 내게 느닷없이 수원행궁이 들이닥쳤다. 수원 화성을 와도 그곳을 들를 줄은 몰랐다. 그렇게 예기치 못한 순간일지는 더더욱 상상 너머였다. 좋아해서 글까지 흔쾌히 써댔던 한 영화의 배경이었던 수원행궁. 그곳이 불현듯 내게 들어온 조화를 나는 지금도 설명할 수가 없다. 갑자기 내게 와서 온통 나를 휘감고 있는 그 영화처럼 아직도 의아하고 생경할 뿐이다.

아마도 진짜 여행이란 건 그런 게 아닐까 싶다. 그렇게 돌연히 주는 강제와 충격으로 자꾸만 내가 작아지고 덜어지는 것. 말하자면 나를 떠나가는 연습과 같은 것. 그 다음 날 멀리 태안반도 학암포 바다가 썰물에 자꾸만 모래밭을 내준 연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서은주(양산 범어고 교사)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