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쟁이 시골 아줌마의 좌충우돌 산티아고 순례길 9편

오늘은 처음으로 배낭을 먼저 보내고 걷기로 했습니다. 카미노에서는 택배처럼 다음 알베르게(순례자 숙소)까지 배낭을 배달해 주는 서비스가 있어요. 물론 4∼7유로 정도 비용은 들지만 간혹 너무 힘들거나 까다로운 길에서 한 번씩 이용할 수도 있답니다. 그래서 오늘은 저도 이용해 보려고요. 그동안 피로가 쌓여 온몸이 매우 아픈데다가 오늘은 오르막도 있고 상황이 별로 좋지 않다는 정보가 있기 때문이에요. 작은 배낭에 간식과 물 그리고 만들어놓은 빵을 넣었어요. 그래도 가방이 묵직하네요.

◇6월 25일 팜플로나∼푸엔테 라 레이나 24㎞

팜플로나 시내는 아직 텅 비어 있었어요. 시내를 지나가는데 바가 보였어요. 카페콘레체(cafe con leche·카페라테)를 한잔 마시고 다시 가는데 차를 타고 가던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막 뭐라고 하는 거예요. 알고 보니 우리가 다른 길로 가고 있었던 거죠. 그러고 보니 보도블록에 조개 모양이 없더라고요.

카미노에서는 표시를 잘 보고 걸어야 해요. 노란 화살표나 조개 모양을 잘 보고 따라가야 한답니다. 수많은 길을 지나야 하기에 이 표시를 찾지 못하면 산티아고를 찾아갈 수가 없어요. 이게 쉬울 것 같으면서도 어렵더라고요. 인생길에도 이런 화살표가 있을까요? 이 길에서는 순례자들이 길을 잘못 들면 서로 가르쳐 줘요. 그래서 다시 길을 찾게 되고 결국 산티아고까지 걷게 되는 거죠.

페르돈 고개 정상에 있는 이정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550㎞ 남았다.

돌아가 길을 찾아가는데 그래도 자꾸 헷갈렸어요. 대학의 교정을 지나고 공원도 지나고 찻길을 따라 계속 걸었죠. 저 멀리 페르돈 고개(Alto del Perdon·790m)가 보이고 큰 풍력발전기가 보이는데 지루하고 힘든 언덕길이 계속 이어집니다. 주위로는 넓은 평원이 펼쳐지고 밀밭은 끝이 없이 이어졌어요. 아직은 덥다 해도 이렇지는 않았는데 오늘은 스페인에 온 후로 가장 더운 날이었습니다. 다리는 너무 아프고 정말 한 발 한 발이 힘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다른 순례자들을 보면 다들 큰 배낭을 메고 힘겹게 걷는데 내 배낭은 너무 작았고 나 자신도 왠지 순례자 같지 않아 마음이 불편하더라고요.

◇나는 누구를 용서해야 하나

드디어 용서의 고개, 자비의 고개라고 부르는 페르돈 고개가 나타났습니다. 수많은 풍력발전기가 장관을 이루며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중세 순례자를 형상화한 철제 순례자상은 바람을 맞으며 순례를 하는 모습이었는데 그때 당시의 고단함이 느껴지면서 지금의 나는 편하게 순례를 하는 것 같아 힘든 마음이 좀 누그러들었습니다. 거기다 정상의 그늘에 신발 벗고 앉아 있으니 바람도 시원하게 불어주고 경치도 멋지고 간식을 먹고 나니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나는 누구를 용서해야 하나' 하고 생각하며 앉아 있는데 용서할 사람은 생각나지 않고 오히려 용서를 빌 일이 더 많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몸이 힘들어지니 겸손해지는 걸까요?

이젠 내리막길이 이어집니다. 스틱에 온몸을 맡기고 천천히 내려갔습니다. 하지만, 가파른데다가 돌멩이는 왜 그리 많은지 만만치가 않습니다. 내리막을 겨우 내려가서 쉬고 있는데 그새 언니가 따라 내려왔습니다. 팜플로나에서부터 걷기 했다는 네덜란드에서 온 라디아라는 예쁜 아가씨와 함께 왔는데 스틱도 없이 너무 힘들어하는 거예요. 하지만, 여기선 살 곳도 없으니 난감한 노릇이죠. 그래서 내 스틱을 둘 다 빌려주고 우리는 언니 스틱을 하나씩 나눠 들고 다시 걸었습니다. 정말 스틱은 내 몸을 보호해준 아주 고마운 친구였습니다. 하지만, 나보다 더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으니 기꺼이 내주게 되더라고요. 이 길에선 나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기회만 되면 서로 도와 주려는 모습이 아름다워요.

팜플로나에서 푸엔테 라 레이나로 가는 길에 지나는 페르돈 고개. 고개 정상에는 순례자 형상의 조형물이 있다.

◇너무도 더운 저녁 산책

뜨거운 길을 걸어가다 저기 큰 순례자기념상이 있는 걸 보니 푸엔테 라 레이나에 다 왔나 봅니다. 푸엔테 라 레이나는 '왕비의 다리'라는 뜻이에요. 이렇게 천천히 왔는데도 일찍 도착한 편이네요.

내 배낭은 무사히 잘 도착해 있어서 참 반가웠습니다. 접수를 하고 방을 배정받아 올라가 늘 하던 대로 씻고 빨래하고 널고 밖에 산책하러 나갔는데 오늘은 너무 더워서 다닐 수가 없었어요. 그래도 안에만 있기는 아쉽잖아요. 게다가 사실은 알베르게도 무척 더웠거든요. 알베르게 근처의 성당에 들어갔는데 성당이 매우 독특했어요. 12세기에 지어졌다는 아주 오래된 성당이었어요. 여태 내가 본 것 중 가장 소박했어요.

너무 더워서 왕비의 다리는 내일 새벽에 보기로 하고 슈퍼마켓을 찾아갔는데 제법 큰 슈퍼가 있더군요. 언니는 예전에 남편이 스페인 주재원으로 근무한 적이 있어 스페인에 살았었노라며 무척 즐거워하더라고요. 팜플로나에선 중국인이 하는 조그만 가게에서 부식을 샀었는데, 큰 슈퍼를 보니 옛 생각이 많이 났었나봐요.

오늘은 밤이 되어도 날씨가 수그러들지를 않아요. 식사 후 산책하러 나가려 해도 덥고, 자려고 해도 덥고 정말 난감하더라고요. 그런데 우리가 침낭을 내 넌 사이에 어떤 스페인 아줌마가 언니 침대를 차지해 버렸어요. 아무도 없는 자리인 줄 알았나 봐요. 아무리 설명을 해도 막무가내, 끝까지 비켜줄 기미가 없더라고요. 하는 수 없이 언니가 침대 2층으로 올라가는 해프닝이 벌어졌어요. 이곳에서 이런 일은 보기 어려운 상황이죠. 자신도 편치 않을 건데….

그래도 오늘 워낙 힘이 들었는지 안 좋았던 상황 치고는 조금 잔 것 같아요. 늦게 들어온 내 위층의 아저씨가 오르내리느라 덜컹거려 잠을 자꾸 깨웠는데도요. /글·사진 박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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