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우해이어보 9편…해수온도에 민감해 '잡혔다 안잡혔다…'

청어(靑魚)는 나에게 과메기로 기억된다. 1990년대 초중반 울산 다운동유적 발굴조사에 참여하면서 태화강변의 포장마차에서 녀석을 처음 마주했을 때의 기억이 새롭다. 당시만 하더라도 과메기는 포항과 울산을 중심으로 알려졌었고, 다른 지역에서는 흔한 음식이 아니었다. 지금이야 겨울철을 대표하는 별미가 되어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있지만 말이다.

청어는 그 이름에서 보듯 대표적인 등 푸른 생선이다. 담정 김려는 <우해이어보>에서 청어의 크기와 맛을 이렇게 설명했다. "진청(眞鯖)은 청어이다. 길이는 한 자 다섯 치이며, 맛은 감미롭고 부드럽다. 구워 먹으면 그 맛이 더욱 좋으므로 참으로 진귀한 생선이라고 할만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해주에서 나는 청어를 제일로 친다. 한나라 때 다섯 제후가 매우 호사스러워서 청어를 즐겼는데, 후세 사람들이 물건 중에서 귀한 것을 오후청(五侯鯖)이라 빗대어 말하였다."

청어는 그때나 지금이나 구워 먹는 방식을 최고로 친다. 당대에는 황해도 해주에서 나는 것을 제일이라 했는데, 이는 허균(1569~1618)이 <성소부부고>에서 "해주에서는 2월에 잡히는데 매우 맛이 좋다"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하지만, 담정은 청어 설명에 이어 "해주에서 잡히는 청어는 청어류이긴 하지만 진짜 청어는 아니다"고 했으니 가려볼 일이다.

우해이어보에서 "청어는 대구를 잡을 때 더러 잡힌다. 그러나 항상 잡히는 것은 아니다"고 했다. 어민들이 잡은 청어를 위판장에 내놓는 모습. /연합뉴스

담정이 말하는 '오후청'은 명나라 말에 이시진이 편찬한 <본초강목>에 민물 청어를 이르는 것으로 나와 있다. 이 책에 "청어는 강과 호수 사이에 사는데 남방에 많다. 북쪽 지방에도 간혹 그것이 있다. 계절에 가림 없이 잡는다. 잉어와 비슷한데 등이 순청색이다. 남쪽 사람들이 많이들 이것으로 젓갈을 담근다. 옛사람들의 이른바 '오후청'이 이것이다"고 했음이다.

이에 대해 담정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선대 유학자들은 청어를 적어(炙魚) 즉 '굽는 생선'이라고 하였다. <속본초강목>의 물고기에 대한 항목인 어부(魚部)에 물고기 이름으로 청어가 있다. <동의보감>에 허준이 이 물고기를 실었는데, 그 주에 이르기를 '우리나라 청어와 다르다'고 했으니 나는 이것이 늘 궁금하였다. 지금 어부가 잡은 청어를 보니 이것이 진짜 청어다."

이 글을 볼 때 허준은 우리나라의 청어와 한나라 때 오후가 즐겨 먹었다는 청어가 서로 다른 것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인식은 당대에는 전문적인 식견을 가진 이들에게 제한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담정 자신도 우리나라 선대 유학자들이 청어를 적어라 했던 만큼 대표적인 구이용 생선으로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속본초강목>의 청어와 다른 것임은 알지 못했다.

이런 까닭은 민물과 바다라는 서식환경이 전혀 다른 고기를 그 겉 빛이 푸르러서 청어라 한데서 빚어진 오류다. <우해이어보>에 실린 청어는 당시까지 우리나라 전 연안에서 잡히던 청어과의 냉수성 어류를 말한 것이고, 한나라 때 다섯 제후가 즐겨 먹었던 청어는 그곳의 민물에서 잡히던 것이므로 서로 다른 어종이다.

최근 청어에 대한 흥미로운 논문이 나왔다. 부경대학교 김문기 교수의 청어 연작물로서 중국 한나라 때 다섯 제후가 즐겼다는 청어와 우리 청어는 이름만 같을 뿐 그 계통부터가 다른 것임을 논증하였다. 그의 글에 따르면, 청어는 한자어이지만 우리나라에서 고려시대 말엽부터 불린 이름이며, 이것이 16세기 중반 이후 전 지구적인 소빙기(小氷期)의 영향으로 한·중·일 동아시아 삼국으로 서식환경이 확대되면서 우리나라에서 부르던 청어라는 이름이 확산한 것이라고 논증하고 있다.

마산어시장 건어물전에 내걸린 말린 청어. 요즘은 꽁치로 만든 과메기가 많지만 본래 과메기는 청어로 만들었다. /최헌섭

이에 따라 중국에서는 민물에서 나는 것과 구분하고자 해청어(海靑魚)라고도 하고, 당시에 새로 나타난 고기라는 의미로 신어(新魚)라거나 조선에서 왔다고 조선어(朝鮮魚)라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일본에서도 이 고기가 우리나라 해역에서 확산한 것임을 알고 청어에 대한 정보를 조선으로부터 받아들여 그 이름을 고려온이라 했다고 한다.

청어라는 이름은 고려시대 말엽의 학자 목은 이색(1328~1396)의 시 '부청어(賦靑魚)'에 처음 나타나서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하면 태종 때부터 고종 때까지 관련 기사가 죽 뜬다.

담정은 어부들이 세금을 피하고자 청어를 정어리인 비의청어라 속이기도 했다며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관동과 관북, 호서와 호남 지방에서 잡히는 비의청어(飛衣鯖魚)는 더욱이 가짜 청어가 분명하다. 어부들이 관청에 세금을 내는 것 때문에 청어가 아니라고 숨긴 것이다." 이것은 당시 조선 정부가 균역법 시행 이후 어부들에게 청어와 더불어 명태를 주요한 세원으로 거두어들이고 있던 사실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담정은 우리 지역에서 청어의 포획 시기를 알 수 있는 기록도 남겼는데 "또한 청어는 대구를 잡을 때 더러 잡힌다. 그러나 항상 잡히는 것은 아니다"고 한 부분이다. 청어는 우해(진동만) 주변에서 대구와 함께 겨울철에 잡아들였는데, 항상 잡히는 것은 아니라고 했으니 한류성 어종인 청어가 해수온도의 변화에 따라 어황이 변동하는 것을 표현한 것일 게다.

이러한 짐작은 정약전의 <현산어보>에 "건륭 5년(1750) 이후 10여 년 동안은 풍어였지만, 그 후 뜸해졌다가 가경 임술년(1802)에 다시 대풍을 맞이했으며. 을축년(1805) 이후에는 쇠퇴기를 반복했다"고 한 부분에서도 확인된다.

경남 지역 청어잡이 때를 알 수 있는 기록도 이어진다. 정약전은 "이 물고기는 동지 전에 영남 좌도(경상북도)에 나타났다가 남해를 지나 해서로 들어간다"고 했으니 동지 이후 한겨울에 대구와 더불어 포획했음을 알 수 있다.

/최헌섭 두류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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