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당신만은 기레기가 아니라고?

새해 첫 미디어 기사는 영화로 시작할까 한다. 정확하게는 영화 속 기자 이야기를 빙자한 자기 반성이다. 참, 이 기사에는 영화 내용이 포함돼 있으니 주의하시라.

지난 연말에 감독판까지 개봉해 흥행을 이어가는 <내부자들>을 포함해 지난해 10월부터 잇달아 개봉한 4편의 영화가 공교롭게도 기자를 소재로 했다. 영화 제목과 개봉일은 다음과 같다.

<돌연변이> 권오광 감독 2015년 10월 22일 개봉 / <특종 : 량첸살인기> 노덕 감독 2015년 10월 22일 개봉 / <내부자들> 우민호 감독 2015년 11월 19일 개봉 / <열정같은소리하고있네> 정기훈 감독 2015년 11월 25일 개봉.

열정같은소리하고있네

이들 영화가 보여주는 기자는 저널리즘, 정의, 진실을 추구하기보다는 밥그릇 걱정으로 앞뒤 없이 특종에 매달리고, 권력·자본과 결탁한다. 특정 시기에 잇따라 개봉한 영화들이 기자의 부정적인 모습을 소재로 한 게 단순히 우연은 아닌 것 같아 영화 제목과 개봉일을 적어 들고 영화 일을 하는 이에게 찾아가 물었다.

일반적으로 장편영화 한 편을 만들려고 대본을 쓰고, 촬영을 하고, 편집을 하는 데는 1년에서 1년 반 정도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영화들이 대본 작업을 시작하거나 완성한 시기를 지난 2014년 후반기로 볼 수 있다. 세월호 참사 재난 보도로 기자들이 한창 '기레기'(기자와 쓰레기를 결합한 말) 소리를 들으며 욕을 먹고 있을 때다. 대본이 이미 쓰였을지라도 당시 기자를 향한 사회의 부정적인 시선이 영화에 녹아들어 갔을 가능성이 크다.

◇진실을 조작하고 이익만 좇는 영화 속 기자들

실제로 <열정같은소리하고있네>에는 대사에 '기레기'라는 말이 나온다. 스포츠전문지 연예부 수습기자(박보영)를 주인공으로 삼은 이 영화는 4편의 영화 중 기자의 일상을 가장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이 영화에서 연예기획사로 상징되는 자본은 기사를 '거래'하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한다. 생존 위기 앞에서 기자 역시 진실보다 거래를 선택한다.

영화에서 '잘못된 걸 잘못됐다고 말하는 게 기자가 해야 할 일이 아니냐'며 수습기자가 따져 묻자 데스크(정재영)가 이렇게 답한다.

"저널리즘? 개도 안 물어갈 그 정의감 때문에 여기 있는 수십 명이 목 잘리는 걸 보고 있어라? 등신처럼?"

내부자들

<특종 : 량첸살인기>에 나오는 기자의 처지도 비슷하다. 시청률과 거기에 따르는 광고 수익은 '자신의 특종이 사실은 오보'라는 기자(조정석)의 괴로운 고백을 무시한다. 진실을 이야기하는 기자 앞에서 보도국장(이미숙)이 한 대사다.

"뉴스란 게 그런 거잖아. 뭐가 진짠지 가짠지 가려내는 거, 그거 우리 일 아냐. 보는 사람들 일이지. 그들이 진짜라고 믿으면 그게 진실인 거야."

<내부자들>은 기자 세계의 어두운 면을 극한까지 몰고 간다. <내부자들>에서는 재벌과 정치인, 수사기관과 조폭으로 이어지는 어두운 거래의 설계자로서 서울지역 보수 일간지 논설주간(백윤식)이 등장한다. 그가 언론인으로서 태도를 드러내는 대사는 다음과 같다. "어차피 대중은 개·돼지들입니다. 적당히 짖다가 알아서 조용해질 겁니다."

최대 광고주 재벌 회장을 후원자로 둔 그는 신문사 편집방향을 주도하고, 노련한 칼럼으로 여론을 만들어낸다. 설정이 제법 현실적이어서 영화를 보면 마치 실제로 그런 일이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영화 스토리보다는 한국 언론에 대해 더 생각하게 됐다'는 관람 후기가 나오기도 하는 이유다. 이런 것을 의식한 듯 영화는 마지막에 이런 자막을 붙인다. "본 영화는 실제와 상관이 없는 허구입니다. 만약 그런 일이 실제 있다면 그것은 우연입니다."

이 영화는 두 달이 넘도록 흥행을 이어가며 관객 수 700만을 넘겼고, 현재 감독판인 <내부자들 : 디 오리지널>이 개봉돼 상영 중이다.

돌연변이

◇현직 기자들의 반응은… '불편 그리고 반성'

이런 상황을 불편한 마음으로 본 기자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중앙일보 이하경 논설주간은 지난달 23일 <영화 '내부자들'이 언론에 묻는 것>이란 칼럼에서 이렇게 적었다.

"이쯤 되면 현실 속 논설주간의 실상을 공개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나는 칼럼을 쓰는 일 말고도 매일 어떤 사안에 입장을 밝힐지를 정하고, 논설위원들이 쓴 사설의 내용을 수정하고 제목을 정한다. 내·외부 필자의 칼럼 내용을 검토해 필요하면 손질하고 때론 몰고한다. 이런저런 고민 속에 판단을 내리느라 하루가 짧다. 자기 칼럼만을 통해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영화 속 논설주간보다는 일이 많다. 물론 약점이 있는 대권주자와 재벌 총수를 컨설팅해줄 정도로 한가하지도 않다."

그러면서도 이 논설주간은 "언론이 살아 있는 권력과 자본을 목숨 걸고 감시하고 있느냐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나는 즉답을 주저할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고 답하기가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지난달 1일 부산일보 이호진 문화부 차장의 <기자를 위한 변명>을 보자.

특종 : 량첸살인기

"오늘날 많은 언론인이 스스로 '월급쟁이'라는 자괴감을 안고 살아간다. 그들이 부딪히는 현실 속 하루하루는 먼 길과 가까운 길, 밥벌이와 사명의식 사이 선택의 연속이다. (중략) '최소한 기레기는 되지 말아야지', '나는 알권리의 대리자야'라는 인식을 가진 기자가 아직은 다수라고, 나는 믿는다."

<돌연변이>에서 공중파 시용(임시직) 기자 상원(이천희)은 정직원이 되기 위한 취재와 취재원인 생선인간 박구(이광수)에 대한 연민 사이에서 괴로워한다. 그가 박구에게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며 한 대사다. "나는 기자가 되고 싶었어. 국민의 알 권리를 대변하여 진실을 알리고,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해서 약자를 보호하는 그런 정의로운 사람이 되고 싶었어. 그런데 안 됐어."

현실 속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많은 '상원'들은 쉽게 그 꿈을 포기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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