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가 우린 가장 행복할까. 명예를 얻을 때 혹은 신분 상승으로 사람들의 부러움을 받을 때일까. 아니면 부를 얻어 경제적으로 윤택한 삶을 영위할 수 있을 때일까. 물론 그것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행복을 느끼는 순간들이다. 그런데 그 순간을 행복이라 여기는 것은 온당한 태도일까. 현실적 욕망 추구에 마냥 부러워하거나 평생 목을 매는 승부를 건다면 이는 분명 허망한 꿈, 허깨비를 쫓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물론 우리가 공기를 호흡하고 땅 위에 발을 딛고 사는 한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 그러한 현실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한갓 그 현실의 노예일 리 만무하다. 그렇다면 우리 눈에 보이는 이 세계는 과연 진짜일까. '행복'이란 이름으로 추구하는 것 중 대부분은 상투적인 관념에 의해 오염되고 또 남들에 의해 이식된 것에 불과하지는 않을까.

올여름에 본 영화이다. 홍상수의 <자유의 언덕> 한 대목에서 카세료(주인공 '모리')는 윤여정에게 이렇게 말한다. 꽃을 아주 오랫동안 바라볼 때가 가장 행복하다, 꽃을 오래오래 바라보다보면 꽃과 자신이 하나가 되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 순간 다른 건 잊어버리게 되고, 자신이 누구인지, 이 세상이 무언지, 또 시간이 무언지조차 잊게 된다고 말이다. 무아지경 혹은 물아일체의 경지라고 말하는, 특히 예술가들이나 명상을 자주하는 사람들에게 자주 찾아오는 이러한 체험은 우리도 무시로 겪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사랑'이라는 체험이 그러하다. 사랑은 닮기, 너와 내가. 진정한 사랑이란 서로를 자기 것으로 지배하고 흔드는 것이 아니라 차츰 닮아가는 것. 그것은 내가 너에게 간단없이 흡수되거나 복속되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므로 그리하여 진정으로 닮는다는 것은 결단코 나 자신을 또 너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므로. 또 그러한 방식에서 우리들의 섬을 건널 진정한 소통의 순간을 맞을 수 있다. 너와 내가 한데 섞이는 무아지경의 그 찰나, 그곳이 바로 우리가 절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는 장소이다. 그곳은 나도 아닌 너도 아닌, 나와 너의 사이, 바로 '틈'이다. 그 틈에서 진정한 이름의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쌓아올려야 할 진정한 현실일지 모른다.

그리고 그 층위에서 이른바 예술, 혹은 생명이 탄생되는 것 같다. 역사적으로도 진정한 사랑과 그로 인한 각고의 아픔이 잉태한 예술작품만이 사람들 심금을 울렸다. 그것은 창작하는 작가에게나 수용하는 독자에게나 같은 것을 공유하게 하는데, 바로 공고했던 하나의 '나' 자신이 균열되고 무너지는 체험이다. 시쳇말로, 진정한 사랑을 하면 녹는다고들 하지 않는가. 또 너무 슬프면 애간장이 탄다고 하지 않는가. 이는 곧 하나의 자아가 '나'를 넘어 '너'에게로 건너가는 경험이겠다. 절대적 자아는 능엄경의 '대정(大情)'이란 말처럼 안과 밖, 또 너와 나의 구별이 없는 경지일 테니 말이다. 그 절대 자아, 절대 자유에서 우리는 절대 행복을 경험할 수 있다. 그러니 무엇이 진짜 세계일까.

/서은주(양산 범어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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