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락내리락 23㎞ 배고프고 다리 아프지만, 친구 같고 동지 같은 다른 순례자들 만나면 수다 떨고 안마 해주고 함박웃음에 기운 솟아

◇6월 23일 론세스바예스에서 수비리까지 23㎞

새벽 5시에 일어나 창문을 열어 보니 안개가 가득 끼었네요. '날씨가 흐린 걸까?'하고 걱정도 되었어요. 거기다 날씨도 무척 춥네요. 침낭을 개고 발에 바셀린을 바르고 준비를 시작했어요. 언니는 피곤한지 이렇게 부스럭거려도 일어나지 않네요. 그도 그럴 것이 나보다 나이도 많은데 어제 19㎞를 10㎏ 가까이 되는 배낭을 지고 걸었으니 얼마나 피곤하겠어요? 조금 기다리니 언니가 일어나서 같이 준비를 했고 추위에 대비해 얇은 오리털 잠바까지 입고 6시 20분쯤 출발을 하였어요. 안개 때문에 몽환적인 분위기의 숲길이 아주 멋졌답니다. 처음엔 춥더니 조금 걷고 나니 날도 밝아지고 추위도 누그러졌어요.

첫 마을 부르케테(Burguete)에 도착해서 처음 나온 바에 들러 크루아상과 커피로 식사를 하는데 걸으면서 자주 마주쳤던 사람들이 반갑게 인사를 합니다. 올라~!! 그리고 이 예쁜 마을이 헤밍웨이가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를 집필한 곳이라고 해서 그 흔적을 찾아봤으나 찾을 수가 없더라고요. 작은 냇물을 건너며 '여기서 헤밍웨이가 송어를 잡았나?' 했지만 그러기엔 너무 작은 내여서 언니랑 둘이 웃고 말았어요. 예닐곱 살 되어 보이는 꼬마가 아빠랑 걷는 모습이 아주 예뻐 '최고!'라고 손짓해 주니 너무 좋아하더라고요.

메스키리츠 고개(Alto de Mezquiriz·930m)를 지날 때는 순례자들에게 안녕을 빌어 준다는 성모상이 있어 우리도 순례자들을 위해 기도를 드렸답니다. 이 길은 사유지도 지나게 되어서 나무문을 열고 가야 하는 곳이 많은데 목장의 동물을 위해 여기선 다시 문을 닫아주는 센스가 필요하죠. 3시간 정도 걸어가니 작은 바가 있어요. 반가움에 들어가 화장실도 가고 간식을 먹고 있는데 한국 가족팀이 지쳐서 들어오는 거예요. 그들은 첫 번째 바에서 아침을 안 먹고 다음 바를 찾다가 그곳까지 굶고 왔다며 그제야 허겁지겁 아침식사를 하네요. 밥도 못 먹고 여태 왔으니 얼마나 배가 고팠겠어요.

23㎞를 걸어 마침내 도착한 수비리 초입에서.

◇부엌을 못 쓰는 숙소 실망…하지만 반가운 친구가

다시 출발해서 산길을 오르는데 날이 점점 더워지니 또 지치기 시작했어요. 트럭 간이 바가 있는 에로 고개를 지나니 돌도 많은 막바지 내리막! 여긴 너무 가팔라서 발이 너무 아팠어요. 2시가 되어서야 겨우 수비리(다리의 마을이란 뜻)에 도착했죠. 8시간 가까이 걸었네요∼. 수비리의 푸엔테 데 라비아 다리(광견병의 다리란 뜻)까지 오니 어떤 소녀가 오렌지 주스를 탁자에 내놓은 거예요. 얼마인지 물어보니 기부제라는군요. 순진한 모습이 너무 예뻐서 한잔 마시고 1유로를 주고는 라비아 다리를 건너는데 다리 밑의 물이 너무 깨끗하고 시원해 보여 발이 담그고 싶어졌답니다.

수비리에 있는 식당에서 일행과 순례자 메뉴를 먹는 박미희(맨 오른쪽) 씨.

다리 주변이 마을 입구였고 알베르게도 많았는데 여긴가? 저긴가? 하며 우리 딸이 추천해준 사립 알베르게를 찾아가는데 자꾸자꾸 가야 하는 거예요. 물가는 멀어지고, 땡볕은 내리쬐고, 드디어 찾아갔는데 급실망, 깨끗하긴 한데 부엌을 쓸 수 없었어요. 지금은 성수기라서 부엌 오픈을 안 한다는 거예요. 한국가족팀한테 모처럼 저녁엔 한국요리 해먹자고 했는데 부엌을 쓸 수 없으니 얼마나 실망을 했겠어요. 하지만 오는 길이 너무 힘이 들었고 또 땡볕을 뚫고 다른 알베르게를 찾아갈 엄두가 나지 않아서 그냥 주저앉았습니다. 그나마 서비스로 주는 맥주를 마시며 마음을 달래야 했지요.

그런데 저기 시몬(첫날 만난 캐나다인 아줌마)도 여기로 들어오고 있네요. 거기다가 우리랑 같은 방이에요. 우리는 반가움에 수다를 떨고 있었는데 우리보다 먼저 짐을 푼 독일 할아버지 두 명이 어디 갔다 들어오더니 우리보고 시끄럽다고 눈치를 주네요. 대낮인데 낮잠 잔다고요. 하는 수 없이 우리는 눈만 찡긋거리며 입 다물고 조용조용 움직였지요. 씻고 나서 한국가족팀과 시몬, 언니와 나 여섯이서 순례자 메뉴를 먹으러 갔습니다. 까미노에서는 가는 곳마다 순례자 메뉴가 있어서 크레덴시알(순례자용 여권)을 보여주면 싼 가격에 식사를 할 수가 있거든요.

수비리 알베르게(순례자 숙소). 쉬고 있는 순례자.

한국가족팀의 딸은 많이 유약해 보이더니 생각보다 제법 잘 걷고 있었어요. 칭찬을 해 주었죠. 엄마도 이 길이 매력이 있다고 이번엔 가족과 로그로뇨까지 걷지만 다음에 꼭 다시 와서 완주하고 싶다더군요. 즐겁게 밥을 먹고 사진도 찍으며 유쾌한 시간을 보내고 숙소로 돌아왔어요. 시몬은 우리보다 더 나이가 많아서인지 다리와 어깨가 아프다고 고통을 호소했어요. 그래서 '다리 마사지해 줄까' 물어보니 단번에 '오케이' 하더라고요. 그래서 서툰 솜씨지만 정성껏 마사지를 해주고 가지고 갔던 파스를 붙여주었더니 아주 고마워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자기는 마사지 자격증도 있으니 내 발도 마사지해 준다고 내놓으라는군요. 헉∼! 그런데 거짓말을 했어요. 간지럼을 타서 안 된다고요. 지금 자기도 엄청나게 피곤할 텐데 싶더라고요. 시몬도 눈치를 챘는지 웃으면서 내일 만나면 해 주겠다며 약속했어요.

일찍 잠자리에 들었건만 잠이 오지 않는 이유는 뭘까요. 일부러 낮잠도 안 잤는데 4일째 이러네요. 카톡하다 밴드하다 겨우 조금 잠이 들었습니다.

한 순례자가 안개낀 론세스바예스를 출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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