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때보다 2주 정도 빠른 겨울방학을 맞이했다. 고3 담임을 하느라 여름엔 방학이 없어서 가족과 제대로 된 휴가를 보내지도 못한데다 일년 내내 동동거리며 바쁘게 살았던 것이 미안하기도 해서 올겨울은 일찌감치 아이들과 모친을 위한 휴가를 계획하며 나름 들뜬 시간을 보냈다. 여행 날짜를 손꼽아 기다리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것도 행복했고, 그동안 엄마 노릇에 소홀했던 것을 다 만회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심리적 위안에 여행을 계획하는 시간이 행복하기만 했다. 다행히 본격적인 시즌이 아니다 보니 저렴하게 제주 항공권과 숙박을 예약하고, 3박 4일 여정으로 이런 저런 계획을 세우느라 우리 가족 모두는 한껏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행복은 딱 계획까지였다. 불행히도.

아이들과 모친과 내가 생각한 여행의 그림이 모두 달랐던 것이다. 지난해 여름휴가를 보내며 다시는 모친과 아이들을 동반한 여행을 하지 않으리라 수없이 결심했던 내가 그 사실을 까맣게 잊었으니, 누구를 탓하랴.

모친은 모친대로 비싼 돈 들인 만큼 제주의 모든 풍경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 본전을 뽑겠다는 결연함으로 차량으로 이동하는 순간들조차 창밖 풍경과 대결하듯 관광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차량에서 잠만 자는 아이들이 못마땅할 수밖에. 게다가 제주의 귀한 토속 음식을 남기는 것도, 틈만 나면 셀카만 찍는 것도, 숙소에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것도 노골적으로 못마땅해 하셨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먹고 싶은 길거리 간식은 먹지 못하게 하면서 입맛에 맞지 않는 해산물을 먹으라고 하거나, 감흥도 없는 드라이브에 억지 감동을 요구하는 할머니를 피곤해 했고, 잠들기 전에 친구들과 SNS를 하며 자랑도 하고 수다를 떨고 싶은데 할머니 눈치를 봐야하니 입이 튀어나올 수밖에.

그들 사이에서 나는 정말 불쌍하기 짝이 없었다. 모친과 아이들 사이에서 제발 빨리 이 여행이 끝나길 기도할 뿐이었다. 나는 왜 지난 여름휴가의 악몽을 기억하지 못했을까 수없이 자책했다.

잔인하리 만큼 정직하게 꼬박 3박 4일의 시간이 흐른 뒤 집으로 귀가하는 나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돈은 돈대로 쓰고 시간은 시간대로 보냈지만 누구도 만족하지 못한 여행이었다는 사실이 내 자신감을 한껏 갉아먹고 있을 무렵, 모친과 아이들이 집을 향해 걸으며 하는 이야기가 얼핏 들려왔다.

"할머니, 집이 제일 편하고 좋아, 그치? 근데 제주도 참 예쁘고 좋더라. 비행기도 신나고, 음식도 맛있고, 우리 다음에 또 가요. 내가 돈 벌어서 더 좋은 데 모시고 갈게." "너거도 좋드나, 할매도 신나고 좋더라. 돈 많이 벌어서 또 구경시켜 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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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어이없는 수다를 들으며 기분 좋은 배신감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인간에게 망각이란 얼마나 고마운 선물인지. 그리고 나는 다음 휴가를 또다시 계획하겠지. 하하하.

/이정주(김해분성여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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