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을 밝히면 돌고 도는 바람개비…"또 오라고"

지난주 남해 독일마을에 사는 한국인 할머니와 독일인 할아버지 부부댁을 찾았습니다. <우리 이렇게 결혼했어요> 취재를 하려는 거였지요. 지난번에 미리 허락을 구했었습니다.

도착하니 할머니께서는 다른 손님을 돌려보내고 막 돌아오시는 길이었습니다. 거실은 잔뜩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장식되어 있었습니다. 소파에 앉고 보니 탁자에 사찰 달력이 가득합니다. 모두 할머니께서 구해 놓으신 거랍니다. 하지만 할머니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십니다. 근데 왜 사찰 달력을 구한 걸까요. 할머니는 달력을 독일로 보낸다고 하셨습니다. 사찰 달력에는 음력이 있어서 독일 교민들이 아주 좋아한답니다.

할머니가 내오신 배와 커피를 먹고 있자니 할아버지가 방에서 나오십니다. 할아버지께는 독일어로 인사를 했는데 오히려 '안녕하세요'라고 한국말로 답하십니다. 할아버지께서 방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 오십니다. 카드와 달력입니다. 카드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한국에 오기 전에 살았던 독일 도시의 한독친목회에서 보내온 크리스마스 카드입니다. 카드 뒷장에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기억하는 분들은 모두 서명을 한 듯 글씨가 빼곡합니다. 달력은 그 도시를 주제로 한 것인데 달마다 귀여운 그림이 있고 날짜는 중요한 행사와 잔치로 채워져 있습니다. 모두 두 분의 추억 속에 가득한 것들이랍니다.

남해 독일마을을 배경으로 켜진 촛불. 따뜻한 공기가 위로 올라가면 바람개비가 돌아간다.

결혼 이야기를 여쭈려고 말문을 여니 할머니께서 난감함 표정이십니다. 할아버지는 괜찮으신데 할머니 자신은 아직 이야기를 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쉽게 꺼내시기가 어려운 기억들인가 봅니다. 괜찮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언제든 하고 싶은 마음이 들면 그때 또 이야기하자고 했습니다. 할머니께서는 먼 길을 왔는데 미안하다며 재밌는 것을 보여주시겠답니다. 창가에 있던 탑 모양의 촛불 장식입니다. 촛불을 켜면 따뜻한 공기가 위로 올라가며 바람개비가 돌아갑니다. 조금씩 어두워져가는 독일마을을 배경으로 촛불이 다 켜지니 마치 동화 속에 있는 듯합니다. 나란히 촛불을 바라보며 할머니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야기를 안 하지는 않을 거야. 다음에 또 오라고."

저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언젠가 <우리 이렇게 결혼했어요>를 통해 두 분을 정식으로 소개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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