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결혼 이주여성이 초등학생 딸 아이를 앞세우고 일요일 오후 열리는 한국어 교실에 들어섰다. 엄마는 아이가 한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한국어를 배우게 하고 싶다며 서툴게 말했다. 혹시라도 아이의 상황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할까봐 내게 두 번 세 번 거듭 말했다.

아이는 반을 배정해주고 엄마에게도 공부를 권하니 자기는 어제 밤샘 노동으로 피곤하다며 밖에서 기다리겠노라 한다.

한동안 좌불안석이더니 문득 조용하다싶어 바라보니 소파에 등을 기댄 채 잠이 들었다. 그 모습을 보며 그녀가 걸어온 길을 더듬어 본다. 베트남의 어느 시골 마을, 아마도 그녀는 가난한 집안의 맏딸이 아닐까. 줄줄이 딸린 동생들과 부모님을 위해 그녀는 한국에 시집오는 길을 택했으리라. 하지만 한국에 와도 결코 녹록하지 않았을 삶이 그녀의 고단한 잠에 묻어있다. 아이를 낳았지만 가난한 삶의 주름은 쉬 펴지지 않았을 것이고 결국 부부는 한 아이를 베트남 외가에 보내는 아픔을 감내했으리라. 세월은 빠르게 흘렀고 열 살이 된 아이를 더 이상 그대로 두기 힘들었을 것이다.

흔히 가난은 비극이요 슬픔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그녀의 삶이 비극이라고 말하기는 이르다. 아이의 천진하고 밝은 표정에서 엄마와 함께한다는 안도감이 엿보인다. 그녀에게 타국에서의 가난하고 고된 생활을 견디게 하는 힘은 바로 아이를 가르치겠다는 엄마의 의지임이 여실히 보인다.

나는 그 이주여성의 모습에서 가난했던 시절 우리들을 본다. 재주 많고 영리했으나 다섯이나 되는 동생들 때문에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취업의 길로 들어서 우리를 부양했던 큰언니 모습이 여자의 고단한 잠 위로 겹친다. 자식들 밥 안 굶기고 제대로 교육시키겠다는 목표에 생의 모든 것을 쏟았던 부모님 모습도 보인다. 울컥 목젖이 부어오른다. 사람 삶이란 게 어쩜 이렇게 시대와 사회가 바뀌어도 틀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되풀이되고 있는 것인가 안타깝다. 하지만 누군가의 희생, 쏟아지는 잠을 견디며 감내한 노동이 또 다른 세대, 내 혈육을 자라고 교육시키는 힘이 아닌가.

나는 잠든 그녀를 깨워 구석방으로 가서 눈을 붙이라고 담요를 내밀었다. 여자는 한 시간여를 푹 자고 한결 밝은 얼굴로 깨어났다. 수업을 마친 선생님은 아이가 꽤 똑똑해서 다음 시간에는 좀 더 높은 수준의 반으로 들어가도 되겠다고 말했다. 여자의 얼굴이 구름 속의 햇살처럼 순식간에 빛난다. 희망을 지닌 자들에게 현재의 가난은 견뎌야할 과정이며 더 나은 미래로 가는 과정이다. 여자는 그 한 마디, 아이가 똑똑하다는 선생님의 말에 힘을 내어서 또다시 몇 번의 야근을 견딜 힘을 얻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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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와 엄마는 고개를 깊이 숙여 고맙다고 인사를 하며 다음 시간표를 몇 번이나 확인하고 문을 나섰다. 늦가을 노오란 은행잎이 아이의 웃음 소리에 모녀의 발걸음을 따라 춤을 추고 있었다.

/윤은주(수필가, 다문화 도서관 '모두' 운영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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