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경남 이야기 탐방대]2015년 11월 1일 <우해이어보>의 산실 진동을 다녀와서

오늘은 이야기탐방대로 출발하는 두 번째 여행이다. 기자님이 이전에 보내주신 자료들에 의하면 오늘은 진해현 관아를 시작으로 부둣가도 가고 고저암도 간다고 한다. 이번에 가는 곳엔 무엇이 있는지 정말 궁금하다.

사실 모든 곳을 일일이 설명하면 좋겠지만 가장 재미있게 본 곳이 고저암이다. 우해이어보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라고 할 수 있는 어류도감이라고 한다. 우해이어보가 아니라 정약전 선생님이 쓴 책(자산어보)이 원조인줄 알았던 나에겐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우해이어보 중 감성돔이야기가 실린 우산잡곡에는 고저암에서 감성돔이 잘 잡힌다고 써져 있었다. 감성돔이 정확하게 어떤 어종인지는 잘 몰랐으나 너무 많이 잡히면 나중엔 멸종위기에 처해지지 않을까라는 엉뚱한 생각도 함께 들었다.

고저암은 내가 아는 낚시터와는 조금 달랐다. 나는 낚시터가 평평하고 물결이 그렇게 심하지 않은 곳이 적절한 장소라고 생각했는데 고저암은 그렇지 않았다. 깎아지른 듯한 바위에 심한 파도가 일렁이는 곳은 말 그대로 위험 그 자체였다. 지금이야 낚시도구들이 많이 발달했다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저곳에서 낚시를 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낚시를 해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저런 곳은 위험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저암을 들렀다 집에 와서 본격적으로 김려라는 사람에 대해 찾아보았다. 김려의 호는 담정으로 노론계의 집안이지만 당쟁의 화를 많이 입었다고 한다. 정조 때에 성균관에 들어갔고 1791년 생원이 되어 총망받는 인재로 인정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지역에 있는 여러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자신이 나라에 공이 많고 벼슬 경력이 많은 집안의 자제들보다 훨씬 더 똑똑하다 말하고 다니다 1799년 유배를 당했다. 순조 1년에 김려는 천주교와 교분을 맺은 혐의로 진해로 유배되어 우해이어보를 쓴 것이라고 전해진다.

물론 맞는 말을 제자들에게 했지만 조금 더 공손하게 살았다면 유배를 당하진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5살에 성균관에 들어가 촉망받는 인재로 살다가 하루아침에 많은 것을 잃고 지방으로 유배되는 심정은 정말 참담했을 것이다. 5년간의 유배 생활 중에 쓴 우해이어보는 후대의 사람들에게 읽을거리를 남겨주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유배 가서 할 일 없이 빈둥대는 것이 아닌, 정말로 필요한 일을 한 김려 선생님을 다시 한 번 더 생각해보는 계기가 된 탐방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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