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2월~1953년 7월 한국전쟁 소용돌이 휘말려 17만 명 잡혀 있던 거제수용소…이념 다툼 속 선택권 없는 피지배층 삶 전쟁 참상 고스란히 비춰

9월 21일 사천 대곡숲과 고자치고개로 첫걸음을 내디딘 '2015 경남 스토리랩 이야기탐방대'가 11월 22일 거제도포로수용소유적공원을 끝으로 탐방을 마무리했다. 여덟 차례에 걸쳐 하동·함양·창원·사천 등에 어려 있는 역사·문화·생태 유적을 둘러보고 이야깃거리를 찾거나 꾸리는 것이었다. 소설가나 시인 같은 문인과 블로거들로 구성된 일반인 탐방대는 11월 9일 거제 지심도가 끝이었고 진주의 청소년신문 <필통> 기자들이 참가한 청소년탐방대는 11월 22일 거제도포로수용소가 마지막이었다.

◇거제도와 포로수용소 = 한국전쟁 당시 포로수용소가 거제도에만 있었을까. 부산·대구를 비롯해 전국 여러 군데에 있었다. 포로가 전투가 있었던 전국 곳곳에서 잡혔기 때문이겠다. 교통 사정이 좋지 않았기에 멀리까지 실어나르기도 어려웠겠지. 한편으로는 이런 사정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부산·대구 같으면 탈출이나 공격이 쉬웠겠지만 바다로 둘러싸인 거제도는 그런 것이 어려웠겠다. 1971년 거제대교가 들어서기 전에는 배를 타야만 드나들 수 있는 섬이었던 것이다.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 전경. /경남도민일보 DB

이에 더해 거제도는 섬답지 않게 지어먹을 농토가 적지 않았고 물까지 풍부하다는 이점을 갖추고 있었다. 거제도포로수용소는 1951년 2월부터 1953년 7월 27일 휴전으로 포로가 송환·석방될 때까지 가동됐다. 포로가 가장 많을 때는 북한 포로 15만, 중국 포로 2만, 의용군·여자 포로 3000명 등 17만 30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여기에 원래부터 살던 주민 10만과 피란민 15만까지 더해져 40만 인구가 전쟁이 끝날 때까지 부대끼며 살아야 했다.

◇포로수용소와 포로들 = 거제도포로수용소는 청소년 탐방대에 많은 느낌을 불어넣어줬다. 멀리 있던 한국전쟁을 가까이로 데리고 나왔다. 여태 교과서나 이런저런 동영상에서 '전쟁의 참상' 운운하는 모습을 봐왔지만 실감을 하지는 못했었다. 물론 포로수용소가 전쟁이 한창 벌어지고 있었던 현장은 아니다. 그런데도 청소년 탐방대는 여기서 한국전쟁의 실상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전쟁이란 무엇일까? 그 허상과 실상은 무엇일까? 여태 일어난 전쟁에서 뚜렷하게 알 수 있는 사실은 그런 전쟁으로 말미암아 지배집단이 치명상을 입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정치, 경제, 영토, 에너지, 이념, 식량 등등 전쟁을 치르는 명분 또는 목적은 끊임없이 바뀌어 왔지만 전쟁이 일어나면 춥고 배고픈 사람만 더욱 추워지고 배고파진다는 사실만은 변함없이 되풀이돼 왔다.

포로수용소유적공원 들머리.

한국전쟁도 마찬가지였다. 맞닥뜨린 나라는 남한과 북한 그리고 중국과 미국이다. 그런데 남한과 북한 그리고 중국과 미국에서 한국전쟁으로 말미암아 지배집단이 바뀌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나라마다 지배집단은 더욱 커지고 단단해졌다. 전쟁 탓에 굶고 얼고 곪고 하다가 결국 죽어나가기까지 했던 존재는 원래부터 춥고 배고픈 사람들이었다. 전쟁은 지배집단이 일으켰고 그 피해는 지배당하는 민중이 뒤집어썼다.

거제도포로수용소유적공원은 남한 또는 미국의 선행과 선처를 더 많이 보여주고 있다. 공산포로들은 그와 같은 선행과 선처를 받았음에도 거듭 악행을 저질렀다는 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를 두고 모조리 틀렸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야기탐방대 청소년들은 이런 측면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한편으로 전쟁의 본성 자체에 대해서도 들여다볼 수 있게 됐다.

포로수용소유적공원을 둘러보는 탐방대.

◇포로수용소와 대한민국 = 최인훈이 쓴 소설 <광장>은 주인공이 이명준이다. 이명준은 남과 북을 오가는 우여곡절을 겪다가 낙동강전투에 인민군으로 나선 끝에 사로잡힌 포로다. 당시 거제도포로수용소에는 이런 이명준이 수없이 많았다. 이명준은 친공도 아니고 반공도 아니다. 이명준은 중립국 인도로 가는 배에서 투신해 죽는다. 한국전쟁이라는 국제전쟁은 한반도 지배권을 둘러싼 충돌이었다. 공산과 반공이 맞붙은 이데올로기 전쟁이기도 했다. 거기에는 지배하는 집단의 이해관계만 있을 뿐 지배당하는 이들의 권리나 인권은 발조차 붙일 수 없었다.

반공도 좋고 친공도 나쁘지 않다. 자본주의도 좋고 공산주의도 나쁘지 않다. 다만 사람에 대한 이해와 존중만 이뤄지고 보장된다면. 그러나 친공도 반공도 그러하지 못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또한 그러하지 못했다. 그리고, 소설 <광장> 주인공 이명준을 보면, '제3지대', '중립국', '반공도 아니고 친공도 아닌 땅'도 그러하지 못했지 싶다. 과연 선택은 어떠해야 했나.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언제 주어지기라도 했던가.

1950년 부서진 대동강철교 그림 앞에서.

전쟁 피해자 보호를 위한 국제조약인 제네바협약을 따르면 포로는 출신 지역(국가)별 일괄 송환(석방)이 맞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는 반공포로와 공산포로로 나눠 반공은 남한에 석방하고 친공은 북한으로 송환했다. 포로를 친공과 반공으로 구분하는 데에 숱한 공작이 개입됐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포로들한테 반공 또는 친공이 무슨 의미였을까? 반공은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고 친공은 돌아간다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은 왜 돌아가지 않았고 어떤 사람은 왜 돌아갔을까? 여러 까닭이 있었을 테지만, 대부분은 먹고사는 문제와 인간관계가 핵심이었지 않을까 싶다. 먹고살기 위해 돌아갔고 먹고살기 위해 돌아가지 않았으리라. 가깝고 친한 사람이 있기에 돌아갔고 가깝고 친한 사람이 사라졌기에 돌아가지 않았으리라. 물론 이데올로기에 따라, 이데올로기가 낳은 잔인함, 잔인함에서 잉태된 어떤 뜨거운 정념 때문에 돌아가거나 돌아가지 않거나 한 사람도 분명 있었겠지.

거제도포로수용소는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이뤄지면서 원래 하던 일을 멈췄다. 지금 거제도포로수용소 자리에 들어선 거제도포로수용소유적공원은 하는 일이 무엇일까. 청소년탐방대는 거제도포로수용소유적공원에 와서 거제도포로수용소를 들여다봤다. 거제도포로수용소를 들여다보니 한국전쟁과 전쟁 일반의 실상과 본성이 보였다. 대한민국뿐 아니라 지구상 모든 인간사회가 전쟁터다. 극히 일부분을 제외하고는.

탱크전시관을 찾는 탐방대.
탱크전시관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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