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간다] (21) 함안 무진정

함안 무진정(이수정)은 그림에 홀려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지난해 '동서미술상'을 받은 신종식 작가의 여러 수채화를 창원 송원갤러리에서 만났는데 하늘에서 내려다본 무진정은 아름다웠다. 초록으로 물든 정자와 햇빛에 반짝이는 잔물결은 가슴에 박혀 언젠가는 떠나야 할 곳이 됐다. 여차여차 시간이 흘러 한 해가 지났고 나뭇잎이 다 떨어질 초겨울에야 함안행 기차에 올랐다.

함안역에서 함안면에 있는 무진정은 멀지 않다. 걸으면 15분 정도다. 기차에서 내려 신개마을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들녘은 휑했다. 추수를 마친 논은 볏짚을 모아 둥글게 묶어놓은 커다란 비닐 덩어리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따스한 겨울 햇볕과 함께 마른 풀을 태운 듯한 겨울 냄새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따라붙는다.

무진정은 그림 속과 달랐다. 봄날 무진정이었던 수채화 속 반짝임 대신 겨울 정자는 푸른 암벽 위에 쓸쓸히 있었다.

나무들 뒤로 무진정이 숨어든 이수정 풍경. 연못 위 작은 세 개 섬을 만들고 다리를 건너 무진정에 이르도록 했다.

조선시대 무진 조삼 선생은 후진양성과 여생을 보내려고 지금 자리에 정자를 직접 지었다. 자신의 호를 따라 무진정이라 이름 붙였다. 조삼은 사헌부 집의를 지냈는데 옳고 그름을 잘 분별하고 백성이 원통하거나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살피는 조선시대 주요 관직을 맡았다. 당시 책무가 막중한 사헌부는 자기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직언할 수 있는 인재가 많았다고 한다. 그의 성격이 짐작된다.

풍경이 좋기로 이름난 무진정은 낙엽조차 볼 수 없는 날에도 사람들이 찾고 있었다. 여러 무리가 연못을 한 바퀴 돌아보고 사라진다.

1929년 4월에 고쳐 지은 무진정은 단순하고 소박했다. 기둥 위에 아무런 장식이나 조각물이 없었다. 정자 바닥은 모두 바닥에서 띄워 올린 나마루 형식이다. 누군가 마루에 올라섰는지 여기저기 발자국 자국이 선명하다. 여름처럼 옆 문짝과 뒤 문짝을 훤히 걷어놓았다. 그래서 구석구석 살펴볼 수 있었다.

무진정에 서서 내려다본 연못은 고요하기 그지없다. 후손들이 물길을 틀어 만든 3300여㎡(약 998평) 규모의 연못에는 섬 세 개가 띄워져 있다. 가운데 육모 지붕을 한 정자 영송루를 중심으로 돌다리가 놓여 있다. 버드나무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하늘을 향해 있고 뗏목으로 썼을 나무들은 물속에 잠겨 있다. 물은 맑아서 보호색을 띤 고기들이 헤엄치는 게 훤히 보였다.

무진정 풍광은 함께일 때 빛이 났다.

이수정을 내려다보는 곳에 있는 무진정.

'큰 냇물이 남쪽에서 흘러오는데 물굽이에는 맑은 거울과 같고, 돌아 흐르는 곳은 구슬 띠와 같아 부딪칠 때는 패옥(왕과 왕비가 옷에 차던 옥) 소리 같으며, (중략) 맑은 바람이 저절로 불어오고 맑은 달이 먼저 이르니 반걸음을 옮기지 않아도 온갖 경치가 모두 모였으니 진실로 조물주의 무진장이라고 하겠다.'

무진정에 걸려 있는 '무진정 기문' 일부분이다. 주세붕 선생의 글 중에 백미로 꼽히는 이 글은 1542년 6월 지어졌다. 학자 주세붕은 큰문장가들이 남길 것인데 자신이 외람되게 무진정에 대해 글을 짓는다고 밝혔다.

아담한 정자와 연못이 400여 년 동안 사랑받는 이유는 무진정 기문을 통해 알 수 있다. 고목과 정자가 잘 어우러져 포근함을 준다.

무진정 마루에 걸터앉아 연못 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가야읍에서 이어지는 도로 위에 차들이 달린다. 어느새 차소리는 점점 멀어진다. 뒤편 대나무에 바람이 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까마득한 세월 속으로 빠져든다.

아라가야의 찬란한 문화가 꽃피었던 곳에서 성산산성에서 발견된 고려시대 연꽃 씨앗 '아라홍련'을 떠올렸다. 조선시대에 지어진 정자에 앉아 2015년 마지막 달을 생각하니 억겁 세월에 먹먹해진다. 또 시간이 흘러 누군가가 무진정을 거닐며 이런 생각을 하겠다 싶다.

성산산성으로 향했다. 고려를 만나러 가는 길. 걸어왔던 길을 되돌아 함안역 방향으로 가다 보면 오른쪽에 입구가 나온다. 무진정에 올라 뒤편으로 산을 쳐다보면 그곳이 산성이다.

괴항마을 어르신이 "단디 고개 올라라"라고 일러준다. 빨간 고추가 마당에 널려 있고 감이 처마마다 주렁주렁 매달린 집들을 지나니 산길이 나온다. 어둑해진 무렵이라 더럭 겁이 난다. 마침 푸드덕거리며 날아가는 새소리에 새가슴이 됐다. "고마 내려오는가배"라고 할머니가 다시 인사를 건넨다.

한 번 더 함안을 찾아야겠다. 성산산성을 눈앞에 두고 돌아섰으니. 옛 시간을 고스란히 간직한 함안, 달력 한 장을 남겨둔 오늘 더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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