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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섬살이·빼앗긴 9년 그래도 꽃은 피고 지네

[2015 경남 이야기 탐방대] (8) 지심도, 동백 발화와 전쟁 포화

김훤주 기자 pole@idomin.com 2015년 12월 03일 목요일

◇사람이 살고 있었네

2015 경남 스토리랩 이야기탐방대가 11월 9일 지심도를 찾았다. 지심도는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다. 요즘 사람살이는 민박과 음식 중심으로 꾸려져 있다. 섬을 찾아오는 손님들을 상대로 장사를 한다. 옛날에는 땅을 일궈 농사를 짓고 고기잡이를 하는 삶이었다. 땅은 손바닥만했고 그나마 띄엄띄엄 흩어져 있었다. 대부분 바위로 이뤄져 있는 섬이다 보니 편평한 데는 거의 없는 편이다. 평지는 여기서 사람들이 고단하게나마 삶을 이어갔던 자리다.

지심도 뭍에서 하는 노동의 고됨은 그래도 견딜 만했지만 바다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버티고 견뎌야 하는 정도는 더욱 크고 세었으며 나아가 생명조차 위태로울 때가 많았다. 바다는 때때로 깊이를 알 수 없는 공포로 생명을 내놓으라 했다. 돛과 노만으로 물결을 헤치고 갈라야 했던 시절이었다. 평소에도 조금만 마음을 놓거나 실수를 해도 바다는 생명을 삼켰다. 배는 작았으며 안전하지도 않았다.

지심도에는 사람이 살았던 그런 자취가 지금도 곳곳에 남아 있다. 건물은 허물어지고 없지만 집터도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알뜰하게 농사를 지었지 싶은 묵정논·묵정밭도 자취가 고스란하다. 원래부터 평지는 아니었다. 높은 데는 깎아내고 낮은 데는 메웠다. 그렇게 메우려면 바위와 돌을 가지고 축대를 먼저 쌓은 다음 흙을 들이붓고 단단하게 다져야 했다. 그렇게 수평으로 맞추고 땅을 굳혀야 집도 지을 수 있고 논밭도 만들 수 있었다. 바위와 돌은 높은 데를 깎아낼 때 생겨났다. 그것은 고된 노동이었다.

이렇게 가난하고 거칠고 위태롭게 삶을 잇고 정을 붙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이들은 왜 섬에 들어와 살았을까 하는 물음은 어리석다. 뭍은 덜 위험하고 덜 고단했지만, 그이들에게 여러 이유로 삶터를 내어주지 않았던 것이다. 섬이 좋고 섬에서 살고 싶어 사는 인생은 없었다. 1908년 현재 13가구 61명이었다고 한다.

◇일본 군인이 들어와 살았네

그런 지심도에 일본군대가 들어왔다. 일제는 지심도에 살고 있던 조선 사람들을 죄다 쫓아내고 포대를 설치했다. 1936년 7월 착공해 38년 1월 완공했다. 길을 새로 닦고 배수로를 내었다. 사병 막사 간부 숙소 급식소 발전소 포진지 방향지시석 서치라이트 탄약고 욱일기게양대 따위도 들어섰다. 규모는 100명 남짓이었다. 중대장은 현관 장식이 있는 별도 관사에 묵었고 일반 사병은 막사에 머물렀다. 발전소 소장은 중대장과 마찬가지로 따로 지어진 숙소에서 살았다.

포진지

일제는 포대 완공 여섯 달 앞선 1937년 7월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하와이 진주만을 습격해 태평양전쟁을 벌인 것은 3년 뒤인 1941년 12월이었다. 지심도는 거제도에서 동쪽 바깥바다로 튀어나와 있다. 뭍이 있는 쪽을 제외하고 부산 영도·가덕도에서 대마도를 거쳐 제주도 앞까지가 모두 한 눈에 장악되는 자리다. 해양과 항공에 걸쳐 군사 요충이었던 것이다. 일본 욱일기(旭日旗)는 섬 서남쪽 끄트머리에서 휘날렸다.

일제의 지심도 점령은 1936년부터 45년까지 9년 남짓 이어졌다. 여기서 일본 군인들이 산 나날이 3000일은 너끈하다. 군인들은 아무래도 팽팽한 긴장 속에 살았을 것이다. 전쟁이 곁에 머물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먹고 마시고 자고 놀고 쉬고 일하는 범주는 벗어나지 않았을 테고 혼자 생각하거나 멍하니 있거나 여럿이 얘기하거나 운동하거나 하는 일도 있었을 것이다. 지배와 관리, 저항과 순응이 없지 않았고 다툼과 사귐 등 갖은 관계와 갈등도 있었지 싶다. 멀리서 희로애락을 전하는 편지·전보도 있었고 거기에는 사랑하는 연인 것도 섞여 있었겠지.

탄약고 내부

◇동백과 대나무도 살고 있다네

지심도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었다. 바위와 흙과 모래 같은 무생물이 주인이었고 그 위를 보드라운 풀이 뒤덮고 있었다. 보드랍지 않은 풀도 있었는데 바람과 눈비는 풀을 여러모로 흔들고 적시며 한 번씩 스쳐갔다. 그런 가운데 동백이 바위 틈에 뿌리를 박았고 그 동백은 또다른 동백이 태어나게 했다. 동백은 갈수록 울창해졌다. 어둑어둑하도록 숲을 이룬 동백은 저마다 꽃을 피운다. 11월 9일 찾았을 때 이미 피어나고 있었다. 동백꽃은 어떨 때는 눈동자처럼 반짝이고 해처럼 환하다. 어느 한순간 자끈둥 통째로 떨어지면 바닥조차도 환하고 반짝인다.

지심도에는 다른 나무와 풀도 많다. 다만 사람들 눈에 도드라져 보이는 것이 첫째가 동백이고 둘째가 대나무일 뿐이다. 대나무는 혼자서 숲을 이루기도 하고 동백 사이에 섞여 자라기도 한다. 대나무는 대가 가늘고 잎이 커서 소리를 잘 낸다. 바람이 불면 '솨아~ 스스' 쓸리는 소리를 내며 흔들린다. 비가 내리면 댓잎이 빗방울 맞아들이는 소리가 난다. 잦지는 않지만 눈 때문에 소리를 낼 때도 있다. 쌓이는 눈을 끝까지 견디다 힘에 겨우면 꺾어지는 소리를 내는 것이다.(포를 쏠 때 땅이 울리는 정도를 줄이려고 일제강점기에 대나무를 들여와 심었다는 얘기가 있다. 그렇기는 하지만 줄기를 보니까 일본 태생처럼 굵지는 않았다.)

지심도 동백숲

대나무와 동백은 사철 모두 푸르다. 푸른빛은 싱싱하다. 그렇다고 해서 동백과 대나무가 언제나 싱싱하지는 않다. 사람들이 그렇게 보고 여길 따름이다. 대나무 푸른빛은 대체로 뽀송뽀송한 느낌을 준다. 동백 푸른빛은 그 윤기 때문에 깜찍하고 톡톡 튀는 느낌이 든다. 동백과 대나무는 여기 살던 사람들한테 어떤 존재였을까? 어떤 감흥과 생각을 떠올리게 했을까? 일운국민학교 지심분교를 다니던 아이들은 터널을 이룬 동백숲과 대숲을 날마다 누볐겠지. 커서 대처로 나간 아이들에게 동백과 대나무는 그 무엇보다 선명한 추억일 수 있겠다.

주둔하던 일본 군대 군인들은 어땠을까? 규율과 복종과 긴장 속에 살아야 했기에 동백이나 대나무조차 그냥 무심하고 무감하게 여겨지고 말았을까? 옛날 살았던 조선 사람도, 그이들 쫓겨난 자리에 들어와 지냈던 일본 군인도, 동백 고운 꽃잎을 한 번쯤은 그윽하게 들여다보고 따뜻하게 품을 수 있었을 것 같다. 사랑스럽고 소중한 그 누구를 떠올리면서 말이다. 고달프고 힘든 섬살이를 버티게 해주는 위안이 됐을 수도 있겠고.

바닥에 떨어진 동백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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