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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떴을 때는 한 사람밖에 없었다

[2015 이야기 탐방대]11월 22일 거제도포로수용소 유적공원을 돌아보고 나서

박주희(청소년신문 <필통> 기자·진주경해여고 2학년) webmaster@idomin.com 입력 : 2015-12-01 17:52:12 화     노출 : 2015-12-01 17:53:00 화

두두두두두두-

총성은 여전하다. 이들의 이유 없는 절박함조차 여전하다.

한국은 전쟁터이다. 실질적 전쟁터이자, 이념의 전쟁터이기도 하다.

밭에서 논을 일구며 그냥 그렇게, ‘이념’이라는 게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소박하고 평화롭게 살던 농민들은, 그 뭔지 모를 ‘이념’ 때문에 총칼을 들고 싸우고 있다. 나는 그런 그들의 모습을 영상에 담는다. 나는 미군 전쟁 기자이다.

며칠 전까지 목숨의 위협을 받으며 한국의 전쟁 상황을 카메라에 담던 나는, 거제에 있는 포로수용소로 발령이 나 최근부터 이곳 속에서의 생활을 찍게 되었다.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이곳은 그럭저럭 생활할 만하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이곳의 시설은 한국군 기지보다 좋다고 한다. 역시 미국에서 지원을 해 준 것인가……. 북측의 군인들이 이곳으로 끌려왔을 때, 이곳에서 생활을 하며 남측의 이념, 즉 미국의 이념이기도 한 ‘민주주의’가 꽤 좋다는 것을 그들에게 인식시켜 주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 결국 전쟁이 끝난다면 저들의 가족을 찾아 고향으로 돌아갈 텐데……. 이념보다 소중한 건, 가족이다. 아무리 그들 앞에서 이념 운운하여봤자, 과연 가족보다 중요한 것이 있을까.

저 멀리서 DDT 용액을 분사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항상 끊임없이 들어오는 사람들. 북측인지, 남측인지……. 입은 옷으로 구별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나중에 이발까지 마친 후 모두 같은 복장으로 갈아입게 되면, 정말 편 가르기 없이, 온전한 하나의 민족이 이곳에 전부 들어찬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물론 종종 중국인들의 얼굴도 보이긴 하지만 말이다.

저편에서 서투른 피아노 소리가 들려온다. 간간히 흥얼거리는 소리도 함께 들려온다. 그 소리의 근원을 따라가니, 과연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며 취미생활을 즐기는 포로들이 있었다. 평소의 어두침침하고 무기력하던 얼굴은 온데간데 없고, 오직 음악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이 가득찬 얼굴로 각자의 일에 열중이다. 역시 음악의 힘이란 대단하다, 싶다.

아직 날이 밝은데도 저녁을 먹으러 가는 이들이 하나둘씩 배식장으로 향한다. 나도 함께 배식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점점 가까워지는 음식 냄새에 내 배도 점점 허기져온다. 그렇게 배식장에 도착해서 음식을 받기 위해 줄을 서며 내 차례를 기다리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나를 툭툭 친다. 놀라서 뒤를 돌아보니, 제임스 포드. 이곳 포로수용소의 관리를 위해 발령난 군인으로, 내가 여기 오게 된 뒤 알게 된, 몇 안되는 친구이다. 반가운 얼굴에 간만에 이야기를 나누며 심심치 않게 순서를 기다렸다.

그런데, 그때였다. 저 뒤편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여러 사내가 큰 목소리로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포드는 얼른 그 곳으로 달려갔고, 나 역시 목에 건 카메라를 쥐고 함께 쫓아갔다. 도착하니 어떤 사내 여럿이 주먹다짐을 하며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포드가 기겁하며 그들을 제지시켰고, 그들은 떨어졌음에도 여전히 씩씩거리며 서로 살기 있는 눈빛을 내뿜고 있었다. 그렇게 사건은 일단락되었지만, 무언가, 끝났지만, 끝나지 않은 느낌이 드는 것은 나뿐일까.

포드와 함께 밥을 먹는 내내 그 싸움의 전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최근 포로들 사이에서 반공 세력과 친공 세력, 즉 북측과 남측의 포로가 나뉘어 서로 견제를 하는 분위기가 점점 고조되어 가고 있다고 한다. 아까의 싸움은 이번 한 번뿐만이 아니라 며칠 전부터 종종 있어왔다고. 놀라기보단 걱정이 앞선다.

시끄러운 소리에 잠을 깼다. 부스스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상황 파악을 하며 막사 밖으로 나갔는데, 이럴 수가. 사람들이 낫, 망치 등등 온갖 흉기를 가지고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폭동이다. 몇몇 사람들은 피를 흘리며 길바닥에 쓰러져 있고, 무기를 든 사람들은 초점이 풀린 눈으로 무차별적으로 사람들을 찌르고, 벤다. 화들짝 놀라 바로 막사 안으로 몸을 피했다. 그리곤 서둘러 카메라를 챙긴 후, 천으로 가려진 입구 틈으로 카메라를 꺼내 조심스럽게 촬영을 하기 시작했다. 과연, 아비규환이다. 온갖 비명소리와 캉캉거리는 쇳소리…… 서둘러 도망가는 발걸음 소리까지, 온갖 끔찍한 소리들이 섞여 내 귀를 찔러댄다. 지옥이 있다면 이보다 더할까.

전쟁, 이건 바로 전쟁이다. 전쟁은 외부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곳은 이념을 달리하는 이들이 같은 공간에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니, 필연적인 결과일 수밖에 없다고 해야 하는 것인가. 이념…… 결국 이념의 차이이다. 이념의 차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다 도망가고 텅텅 빈 이 곳 안으로 갑자기 어떤 한 사내가 넋이 나간 표정으로 뛰어들어온다. 기겁하여 그대로 막사 밖으로 도망치려 하다, 멈칫. 이대로 밖에 나가면 죽는다. 뒤를 돌아보니 사내의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다. 반공분자인 것인가……. 어제 들었던 포드의 말에 의하면, 이 폭동은 분명히 친공분자들이 일으킨 것임에 틀림없다. 아마도 반공분자들을 처단하기 위함일 테지. 넋을 잃은 상태로 상황판단을 하지 못하고 헥헥대는 것으로 보아, 어디서부턴가 도망쳐 온 것이 틀림없다. 카메라를 들어 사내를 촬영한다. 하지만 나 역시 아직 상황판단이 제대로 되지 않는 건 마찬가지. 무엇이라도 물어볼 생각으로 사내에게 말을 걸려는 찰나,

“……”

낫을 든 한 사람이 막사 안으로 들어온다. 얼굴에는 광기가 도는 회심의 미소가 걸려 있다. 인기척에 뒤를 돌아보는 또다른 한 사람은 그와 눈이 마주치고, 그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덜덜 떠는 사내를 향해, 단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 내려찍는다. 난 눈을 감았고, 눈을 떴을 때에는, 한 사람만이 내 앞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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