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우해이어보] (6) 아름답다는 뜻의 옛이름 '보라어'

1980년대 초에 마산에는 '가포 퐁당대학'이 있었다. 현 마산가포고등학교가 바로 그 대학의 옛 터다. 원래 이름은 마산교육대학, 이 대학이 4년제로 바뀌면서 마산대학이 되었고 1983년에 창원으로 옮겨 85년에 현재의 창원대학교가 되었다. 가포 '퐁당대학'이라는 말은 이 학교가 가포 바닷가에 인접해 있어서 운동장에서 축구나 야구를 하다가 공이 울타리 바깥으로 넘어가면 바닷가로 '퐁당' 떨어지는 일이 허다하여 붙은 이름이다.

이 학교는 교육대학의 맥을 이어 졸업 후 교원자격증이 주어졌고 국립대학이므로 사립대학에 비해 학비가 싼 혜택(?)이 있어 농촌 출신 학생과 여학생이 상대적으로 많은 편이었다. 대부분 학생들은 경제 사정이 넉넉지 않아서 단칸방에 곤로('풍로'의 일본어), 냄비, 수저 하나만 달랑 들고 자취하는 경우가 많았다. 먹을 것이 넉넉지 않아 가끔 학과 단합대회를 하는 날이 자취생들의 영양보충일이 되었다. 그 당시 단합대회 참가비가 500원, 매운탕이 1000원, 소주가 250원, 차비도 비슷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학교가 바닷가에 있다 보니 밥반찬이나 술안주로 매운탕이 많이 나왔다. 가난한 학생들은 매운탕 건더기는 그대로 두고 몇 번이고 국물만 다시 부어 안주로 삼았다. 인심 좋은 주인은 두부 두어 조각을 더 넣어서 내주며 걸쭉한 욕도 한마디 섞어 주었다. '이놈의 자슥들은 고기도 먹을 줄 모르나 두부만 건져 먹거로' 하며 다른 반찬도 덤으로 내어주셨다. 이런 자리에서 생선 건더기를 먹는 사람은 역적 취급을 받을 정도였다.

볼락./박일호 기자 iris15@idomin.com

그때 매운탕의 주재료는 조기였고 매우 재수 좋은 날은 볼락이 조기 대신 폼나게 냄비에 누워 있었다. 당시 가포와 진동 광암 앞에는 해수욕장으로 사용하던 모랫벌이 넓게 펼쳐져 있었고 그 바로 옆 부두에는 고깃배들이 끊임없이 오가며 물고기들을 공급하였다. 상품 가치가 있는 크고 굵은 물고기들은 마산 어시장으로 가지만 작고 돈이 되지 않는 물고기는 현지에서 횟집이나 식당으로 팔려나갔다. 그중 매운탕으로 매우 인기가 있는 물고기가 볼락이었다.

학과 단합대회를 할 때면 식당에서 매운탕이 나오기 전에 이미 술병이 몇 놈 김치를 벗삼아 나뒹굴었고 사람들은 목소리가 도도하게 높은 것이 일반적 상황이었다. 그러므로 대부분 매운탕이 나올 즈음에는 국물 한 숫가락이면 만족할 정도였다. 경남 서부 산골에서 마산으로 유학을 온 한 친구는 신선한 물고기를 신봉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는 매운탕에 조금 큰 생선, 특히 볼락이 거드름을 피우고 누워있으면 눈을 반짝이며 번개같이 손을 놀렸다. 나머지 사람들이 놀라움으로 당혹해하는 찰나 그 친구 앞접시로 날아간 볼락은 더 이상 다른 사람이 먹지 못할 상황으로 변해 있었다.

산골 친구의 얼굴에 만족한 미소가 가득 번지며 눈썹이 위로 상승하는 동안 나머지 친구들의 입에서는 절망과 아쉬움의 탄식이 터지며 팔자 눈썹이 되었다. 이때 그 친구 왈, 잘 들어가는 부엌 아궁이에는 진솔가지나 마른 솔가지나 막 집어넣어도 잘 탄다더라. 이렇게 일갈한 다음 거침없이 한 마리를 먹어치웠다. 그러나 볼락도 만만찮은 상대였다. 뼈가 매우 단단하고 날카로워서다. '에이 이놈의 뽈라구! 빽다구 쎈 것이 못된 양반놈들 빽다구 같네.' '야! 양반이 어때서 양반보다는 요즘 정치하는 놈들 같지!' '그래 그건 맞다.' 친구들은 빼앗긴 볼락보다는 앙앙거리는 한마디 말에 가슴을 후련하게 열고 박수를 치며 좋아하였다.

우리는 볼락을 대개 뽈라구라고 불렀다. 김려의 <우해이어보>에서는 볼락을 보라어(甫羅魚)라고 하였다.

"보라어는 호서지방에서 나는 황석어(黃石魚)와 비슷하나 매우 작고 색깔이 옅은 자주색이 비친다. 이곳 사람들은 보락이라고 하거나 혹은 볼락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말로 연한 자주색을 보라(甫羅)라고 하는데 보(甫)는 아름답다, 혹은 좋다는 뜻이다. 원래 보라(甫羅)는 아름다운 비단이라는 말과 같다. 그러므로 보라(甫羅)라는 명칭은 이것에서 처음 시작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김려는 볼락을 이름 때문에 보랏빛으로 본 모양이다. 보랏빛과 자줏빛, 비단, 아름다움, 좋음이 연상되게 하는 단어가 물고기 이름으로 쓰임이 매우 이채롭다. 서양에서는 보라색이 부귀와 권위, 존엄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보라색 볼락 외에도 볼락은 그 종류가 매우 많다. 조피볼락(우럭), 불볼락(열기), 쏨벵이가 있고 개볼락, 누루시볼락, 황점볼락, 도화볼락, 세줄볼락, 탁자볼락 등도 있다.

<우해이어보>에는 볼락젓갈 이야기가 있다.

"거제도의 사람들이 볼락 젓을 담가 수백 항아리씩 배에 싣고 와서 부두에서 판다. 그리고 생마(生麻)와 바꾸어 가는데 대개 거제에서는 볼락이 많이 생산되지만 삼이나 모시가 귀한 때문이다. 젓갈의 맛은 짭짤하지만 그 단맛이 마치 쌀엿 같이 달다. 밥상에 올리면 윤기가 흐르고 그 색깔은 더욱 좋다. 신선할 때는 지져서 먹는데 졸아들면 모래 냄새가 난다."

김려는 볼락 젓갈과 매운탕을 먹어본 듯하다. 요즈음 마산 어시장에는 볼락회가 많이 팔린다고 한다. 김장철에 작은 볼락은 젓갈 대신 배추김치에 넣어 삭혀 먹으면 그 맛이 일품이다. 그러므로 작은 볼락을 젓볼락이라고도 한다.

마산 광암해수욕장이 성업할 때 이곳의 볼락 매운탕이 유명하였다. 지금도 그 근처 진동에서 낚이는 고기는 맛이 좋기로 소문나 있다. 옛날부터 다른 지역에서도 '진동 생선'이라고 하면 특별히 가격을 더 셈해 주었다고 한다. 진동에는 진동 사람들이 밤새 잡은 생선을 내다 팔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진동 골목'이라는 어시장이 있을 정도다. 김려의 <우산잡곡>에 볼락을 노래한 시가 있다.

'달 기울고 까마귀 우는 바다, 한 밤 밀물 들어 울타리 앞 두드리듯, 아마 볼락 실은 배 들어왔나 보다, 거제 뱃사람들 물가에서 떠들썩하네.'

/박태성 두류문화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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