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벗이요 가족이요 스승이었다…해오름예술촌·독일마을 조성 문화 불모지를 예술 일번지로

지난달 19일 남해해오름예술촌 촌장 불이 정금호 선생이 영원한 안식에 들었다. 향년 68세. 그는 드디어 세상과 하나가 됐다. 아니 그는 이미 세상과 하나인 삶을 살아왔다.

◇미치거나 괴상하거나 = "나의 호가 왜 불이(不二)냐고 묻는 사람이 있습니다. 너와 내가 남이 아니며, 내가 자연이고 자연이 나임을 느끼며 살고 싶어서 그런 호를 갖게 된 것이라고 얘기해드립니다."

바깥에서 보기에 그는 미친 사람(광인·狂人)이거나 괴상한 사람(기인·奇人)이었을 것이다.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젊은 나이에 건축사업에 뛰어들어 큰돈을 벌었다. 돈의 뜻을 모를 나이에 얻은 경제적 성공은 자연스레 술, 도박, 여자로 이어지며 사업이 망했다. 그리고 고향 남해로 돌아와 20년간 고등학교 교사로 지낸다. 교사로서 그의 삶도 평범하지는 않았다. 수학여행 마지막 날 과감하게 나이트클럽을 통째로 빌려 아이들을 놀게 한 이야기나, 여름 방학 때 한 달치 월급을 몽땅 투자해 만화책을 산 다음 만화 무료 대여점을 운영한 일은 소소한 일화일 뿐이다.

남해 해오름예술촌 수염 바리스타 1호로 유명했던 고 정금호 선생. /문찬일

불이 선생은 김두관 전 경남도지사가 남해군수를 하던 시절 그의 권유를 계기로 25년 교사 생활을 접고 예술촌 조성에 매달렸다. 장소를 물색하다 발견한 것이 폐교된 물건초등학교 건물이었다.

"폐교를 보는 순간, 나는 내 마지막 투혼을 불사를 곳이 바로 이곳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날부터 다시 또 한 번 미치기 시작했습니다."

또 하나 그가 심혈을 쏟은 것은 독일마을 조성이었다. 직접 독일까지 찾아가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을 만났고,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남해군 삼동면의 땅을 마을 관련 부지로 싼값에 내어놓기도 했다. 그가 후반생을 바쳐 일구어 놓은 남해 해오름예술촌과 독일마을은 이제 남해 대표적인 관광지가 되었다.

모두 쉽지 않은 일이었고, 그래서 항상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야 했다. 그야말로 쉼 없이 달려온 인생이었다.

◇김우자 할머니 회고 = 지난 2003년 독일마을 최초 이주자 중 한 명인 김우자(75) 할머니는 불이 정금호 선생 이야기를 꺼내자 바로 눈동자에 눈물이 어른거렸다.

"실감이 안 나요. 죽은 사람이 내일이라도 올 거 같은데…. 불이 선생 집이 근처 동천마을이야. 매일 아침을 우리 집에서 먹었지. 또 피곤하면 와서 한숨 자다 가기도 하고, 그냥 가족 같은 분이에요. 지금도 죽었다고 생각을 못하고 아침마다 밥상을 떡하니 차려놓고 기다리다가 밥 먹으러 안 오니까 성이 나고…."

김 할머니 부부가 불이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지난 2003년이다.

"2001년에 당시 불이 선생이 독일로 혼자 우리를 만나러 오셨어요. 당시 한창 오사마빈라덴을 잡으러 다닐 때였거든. 정 선생이 오사마 빈라덴처럼 생겼어. 그래서 공항에 6시간이나 잡혀 있었어요. 그렇게 해서 우리 집에서 두 달 정도 같이 지냈어요."

김우자(왼쪽) 할머니와 문찬일 씨가 생전 불이 정 선생을 추억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서후 기자

할머니 부부가 남해에 정착하기로 하고 지금은 독일마을이 된 자리에 집을 지을 때도 불이 선생이 유일한 벗이자 조언가, 협력자였다.

"예를 들면 집을 지을 때 상량식을 하고 고사를 지내잖아. 우리는 예수 믿는 사람이라 그런 거 안 한다 하니까. 그런 소리 하지 마이소. 이 땅에 먼저 살던 미생물과 개미, 벌레, 뱀 같은 생물을 쫓아내고 당신들이 집을 짓는데 미안하다고 인사는 해야 할 거 아니가, 하는 거라. 들어보니 맞아요, 그 말이. 그렇게 시키는 데로 제사도 다 지냈죠. 그 후로 어디에 생일잔치고 결혼이고 있다 그러면 항상 데리고 다니고, 같이 어울리고 맛있는 거 먹고 그렇게 했어요. 그것이 한국의 정이란 걸 나중에 알게 됐지요."

◇문찬일 씨 회고 = 남해군청 앞에서 식당을 운영하면서 남해바래길을 기획하고 조성하는 데 앞장선 문찬일(58) 씨는 불이 선생을 만나 자신의 삶이 크게 바뀌었다고 했다.

"정확하게 1999년 4월 18일 불이 선생님을 처음 만났습니다. 왜 날짜까지 기억하느냐면 그날이 내가 새로 태어난 것처럼 느낀 날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저는 인생 목표가 사라지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죠. 아는 분이 정금호란 분이 계시는데 만나서 의논을 한 번 해보라더군요. 그래서 찾아갔어요. 지금도 그날의 그 인자한 미소와 태도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후로 문 씨는 '불이 옆에는 항상 문찬일이 있다'는 말이 나올 만큼 선생과 함께하는 일들이 많았다.

"한 번은 선생님과 같이 차를 타고 가는데, 길이 엄청나게 막혔어요. 그런데도 선생님은 유쾌한 표정이었지요. 그래서 물었지요. 아니 선생님 차가 이렇게 밀리는데 뭐가 그리 즐거우십니까. 차가 하나도 없는 도로를 달리면 내가 과속을 해서 다치지 않겠나, 그걸 미리 방지해 주면서, 이렇게 나와 함께 가는 저들이 있어 내가 즐겁지 않은가."

문 씨에게 불이 선생은 형제자 아버지, 형님이면서 스승, 동지 같은 분이었다.

"제가 지금 58세인데요. 앞으로 내 힘으로 노동할 수 있는 기간이 많아야 20년도 안 될 거예요. 그때까지 내가 살아가는 방법을 어떻게 선택해야 할지는 선생님께서 많은 모범을 주고 가셨죠."

◇그리고 남은 것들 = 지난달 22일 오전 10시 남해군 삼동면 해오름예술촌에서 불이 선생의 영결식이 열렸다. 영결식에는 삼동면 주민과 독일마을 사람들을 포함해 200여 명이 모였다. 모두 불이 선생과 인연이 깊은 이들이다. 몸은 죽었지만 불이 선생이 할 일이 아직도 남아 있다. 동티모르에 학교를 지어주는 일과 남해 해오름예술촌을 계속해 잘 이끄는 일이다.

이 일은 선생의 아들 정남진(46) 씨가 이어서 맡을 것이다.

정 씨가 아버지의 상을 당하고서도 지난달 31일에서 이달 1일까지 남해 해오름예술촌에서 열린 동티모르 야생커피축제를 강행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참고 도서 <마음으로 본 큰 세상>(정금호, 도서출판 우리글, 2008)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