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쟁이 시골 아줌마의 좌충우돌 산티아고 순례길 5편

6월 21일 생장에서 오리슨까지 8㎞

오늘 걸을 길은 생장에서 오리슨(Orisson)까지 8㎞예요. 이른 아침, 밤새 잠을 설쳤고 새벽부터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이 깼지만 그냥 누워 있었어요. 우린(박미희 씨와 미국 교포 언니- 편집자 주) 오늘 일정이 느긋했으므로 서두를 필요는 없었거든요. 근데 다들 나가는 눈치라서 일어나 보니 벌써 출발한 사람도 있더라고요. 우리는 오늘 오리슨이라는 곳까지만 가기로 했고 또 성당에서 미사를 본 후 출발하기로 했기에 천천히 준비하고 식당으로 내려갔어요. 봉사자들이 아침준비를 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바게트 빵과 채소, 살라미(이탈리아식 건조 소시지), 여러 가지 과일, 그리고 커피(이곳의 커피는 사발에다 줍니다.ㅋㅋ). 우유를 듬뿍 넣어 빵과 함께 먹고 나니 속이 든든했어요.

생장 출발 전 성당에서.

준비를 다 마쳤는데도 오전 7시 30분, 아직 미사까지는 한 시간이나 남았네요. 이야기 좀 나누다가 알베르게(순례자 숙소) 봉사자들의 축복을 받으며 성당으로 갔지요. 미사는 한 시간 넘게 라틴어로 진행되었는데 알아들을 수 없으니 좀 지루하기도 했어요. 그래도 대장정의 시작을 미사로 할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이번 순례길을 허락해 주신 것에 감사드렸고 하루하루, 매시간 함께해 주시길 간절히 기도 드렸습니다. 미사 후 성당 앞에서 사진도 찍고 등산화 끈도 죄고 장갑을 끼고 스틱도 준비, 전열을 가다듬은 후 '파이팅!!'을 외치며 우린 800㎞ 대장정의 길을 출발했습니다.

너무도 예쁜 프랑스의 시골길을 따라 얼마를 가니 카미노를 통틀어 가장 아름답다는 피레네 산맥이 아름답게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주변에 피어 있는 아름다운 꽃들도 순례길을 축복해 주는 듯하더라고요. 우리가 걸으려는 프랑스 길로 걸으려면 피레네 산맥을 넘어야 합니다. 피레네 산맥을 넘어 론세스바에스(Roncesvalles)까지 가려면 두 개의 길이 있는데, 시간은 걸리지만 피레네를 바로 넘어가는 방법(나폴레옹 길)과, 짧으면서 피레네를 우회해 발카를로스를 지나가는 방법(발카를로스 길)이 있어요.

생장∼오리슨 8㎞ 순례길.

우리 딸이 지난 3월에 걸었을 때는 눈이 너무 많이 와서 피레네를 넘는 것은 엄두도 못 냈고 발카를로스로 가는 우회도로마저 눈이 많이 내려 구조대원에게 연락을 해서 겨우겨우 지났다고 했었어요. 그래서 나는 길이 매우 험준할 거로 생각했는데 멋진 풍경에 눈이 홀려서인지, 너무 험할 거라고 걱정을 미리 해서인지 날씨도 선선하고 길도 원만해서 걸을 만했어요. 겨울에 간혹 출입을 금해도 이 길을 걷다가 조난을 당하기도 하는데 왜 사람들이 이 길을 그렇게 걷고 싶어 했는지 아름다운 피레네를 보면서 이해가 되더라고요. 하늘은 말할 수 없이 푸르고 대지는 촉촉하고 양떼와 소들이 풀을 뜯는 풍경이 부드럽게 이어지는데 계속 아름답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어요. 그저께까지는 이곳에 비가 내렸다고 하네요. 그런데 이날부터 날씨는 에브리데이 쾌청!!!

쉬엄쉬엄 여유롭게…이리 금방 도착할 줄이야

헐떡거리며 오르막을 올라가니 두 여인이 쉬고 있다가 우리 보고 쉬어가라며 자리를 내어 주었어요. 둘은 모녀 사이로 미국에서 온 앤과 클래어예요. 가볍게 이야기를 나눈 후 인사를 하고 헤어졌지요. 그곳에 앉아 눈앞에 펼쳐지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며 물도 마시며 쉬었어요. 오리슨까지 두 시간 남짓이면 된다고 해서 정말 쉬엄쉬엄 경치를 구경하며 천천히 걸었답니다. 이야기를 나누며 오르막을 오르다 산길을 돌아가니 거기에 집이 하나 나타났는데 거기가 오리슨이라는 거예요! 그래도 그렇지 너무 빨리 나타나니 좀 당황되더라고요. 아직 낮 12시도 안 되었으니 말이죠.

알베르게로 들어가니 벌써 많은 사람이 도착해 있었고 또 론세스바에스까지 가는 순례자들이 쉬었다가 출발하기도 하더라고요. 그런데 좀 있다 보니 생장에서 만났던 한국인 가족 3명도 여기에 먼저 도착해 있는 거예요.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침대를 배정받아 들어가니 좀 어둡고 습하고 맘에 안 들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지요. 알베르게는 이곳 한 곳뿐이니까요. (ㅜㅜ) 숙소 비용도 너무 비싸고 시설도 안 좋았고 거기다 샤워도 쿠폰을 넣고 하는데 시간 안에 하려니 얼마나 바쁘던지요. 아쉬운 대로 샤워하고 나와 보니 전망은 좋은데 주변에 갈 곳도 없네요. 건물이라고는 요 알베르게 딱 하나! 정말 심심할 지경이었어요.

오리슨 알베르게(순례자 숙소).

오래 걷지 않아서인지, 오다가 이것저것 먹어서인지 배도 별로 고프지 않아 맥주 한잔과 대강 챙겨둔 빵으로 점심을 먹고 빨래를 널고 나니 할 일이 정말 없어요. 저쪽에서 아까 오면서 만났던 앤 모녀가 같이 앉자고 하더군요. 엄마 앤은 산티아고까지 걸을 거고 딸 클래어는 로그로뇨까지 같이 걸을 예정이라고 합니다. 또 조금 있으니 한국 가족도 함께했고 어제 같이 묵었던 시몬, 프랑스인 장도 들어와서 아는 사람이 좀 많아졌어요. 사진도 보여주며 손짓 발짓으로 이야기를 했고 그나마 동행한 언니 덕분에 사람들과 대화를 좀 할 수 있었지요. 음악도 듣고 주변을 산책도 하고 일기도 쓰며 시간을 보내다 드디어 기다리던 저녁 시간! 알베르게에 묵는 사람들이 모두 함께 모여 식사를 하는데 다행히 음식이 제법 맛이 있어 불만이 조금 사라졌어요. 함께 나온 포도주로 건배를 하고 다들 유쾌하게 식사를 했답니다. 식사 후 산책을 하고 오후 10시쯤 잠자리에 들었는데 쉽게 잠이 들지 않네요. /박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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