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사랑 삶이 버무려진 바닷가 골목…옛것은 깊어지고, 새것은 스며들고

통영 강구안 골목에서 '통영라이더'라고 불리는 이승민(46) 씨를 만났다. 인력거를 끌고 뒷골목 투어를 한다는 소식에 만나고 싶었다. 그런데 약속 당일 잔뜩 흐린 날씨 탓에 인력거는 창고행. 이슬비가 내리는 가을날 그와 강구안 길을 걸었다.

강구안은 통영항의 중앙동 일원을 말한다. 거북선과 판옥선이 띄워져 있는 문화마당 맞은편, 충무김밥과 꿀빵을 파는 가게가 연이은 중앙시장에서 안쪽으로 들어가면 된다.

"저는 통영 사람입니다. 나고 자랐죠. 무궁무진한 맛이 있죠. 통영은. 몇 년 전 향토사 수업을 들었고 직접 눈으로 보고 발로 걸으며 공부했습니다. 통제영 시절부터 근현대까지, 인력거를 끌며 그런 이야기를 해줍니다. 강구안은 통영의 명동이었습니다."

이 씨는 십자가 형태로 조성된 강구안 골목 구석구석을 보여줬다. 길은 길지 않다. 오히려 아주 짧은 편이다. 무심코 지나친다면 채 10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

통영 전도사 이 씨의 안내를 마치고 혼자 다시 걸었다. 시간은 어느새 훌쩍 지나 하나둘 저녁 불빛이 살아나고 있었다. 강구안 골목은 그런 곳이었다.

이중섭 식당

연장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대장간이다. 한 어르신이 불 앞에 서서 벌겋게 달아오른 쇳덩어리를 살펴보다 두드린다. 55년 묵은 대장간인데 호미와 괭이, 낫, 회칼을 만든다. 오래전부터 통영 외곽 섬주민의 일손을 돕는 곳이었다. 주인장은 밭을 고를 호미와 낫, 얕은 바닷속에서 고기를 잡을 어업용 연장을 만들어냈다. 어스름이 몰려 올 때 남은 불씨에 생선 몇 마리 구워 소주 한 잔하는 게 행복이라고 말하는 어르신은 이날도 지인들과 즐겁게 저녁 안줏거리를 고민했다.

대장간

강구안의 상징인 은빛 고등어가 미술 작품으로 서 있는 곳을 기준으로 삼으면 대장간은 왼쪽에 있다. 그 옆에는 가장 밤늦도록 불이 켜져 있는 전당포가 자리 잡았다. 맞은편에는 옷수선집과 70년간 이어왔다는 돼지국밥집이 손님을 맞이한다.

강구안 골목은 수십 년 된 맛집과 통영에서 가장 오래된 여관, 삼대를 이은 식당, 대장간의 풀무가 여전히 남아 있는 곳이다. 또 세월을 고스란히 입은 유리점과 사진관이 있다. 유리가게는 30년이 됐다니, 모두가 새것에 홀려 몰려갈 때 그 자리를 지켰다. 눈이 침침해 눈금자 보는 것이 힘들지만 단골이 발길을 돌릴까 봐 문을 닫지 못하는 가게. 손자 사진을 들고 와 액자에 넣어달라는 어르신의 마음을 저버릴 수 없단다.

카페

통영 여객선터미널이 옮겨가기 전까지 통영 중심가 역할을 맡았던 강구안도 쇠락할 수밖에 없었을 터. 통영시는 2013년 푸른통영21 등이 힘을 합쳐 골목재생사업을 시작했다. 지금은 지중해 바다가 떠올려지는 파란색이 돋보이는 게스트하우스와 직접 로스팅해 커피를 내놓는 카페, 손수 만든 양초를 내놓는 가게가 들어와 있다.

게스트하우스
고등어 모양 조형물

이 씨 말대로 자꾸 위를 올려다보며 걸었다. 대부분 건물이 2층짜리인데 일본식 가옥 구조가 그대로 남아 있다. 집 곳곳을 수리했음에도 일본식 집의 형식이 교묘히 섞여 있다.

이 씨에 따르면 강구안은 일제강점기에 매립됐고 당시 집이 많이 지어졌단다. 지금도 통영에는 적산가옥(1945년 광복 이전까지 남겨진 일본인 소유 주택)이 많다고 했다.

이는 강구안 골목의 다른 풍취를 내놓는다. 사람들이 일부러 골목을 꾸몄지만 인위적이지 않은 것은 아마도 과거가 있기 때문이겠다.

강구안 방향 골목

또 하나 시인 백석(1912~1996)이 가슴에 남는다. 그의 시가 골목 벽면마다 여러 개 내걸려있다. 첫눈에 반한 여인 란을 보려고 통영에 왔다는 그의 일화는 유명하다. 몇 차례나 그녀를 만나러 왔지만 집 주변만 기웃거렸다는 그. 아마도 강구안에 왔었겠지. 란이 살았던 명정동과 멀지 않으니 말이다. 그는 쓸쓸한 마음을 이끌고 골목을 걸으며 멀리 항구를 바라봤을 것이다.

그 시절 통영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찾았다는 강구안. 어부들은 선술집에서 거친 손을 내밀며 한 잔 들이켰겠고 부산으로 삼천포로 여수로 가려는 지역민은 충무김밥을 먹으며 배를 기다렸겠다. 통영은 동피랑이든 미륵산이든 중앙시장이든 어딜 가든 이야기가 흘러 넘친다.

강구안은 해거름이 찾아올 때 가보자. 고단한 하루를 마쳤던 그 시절 사람들의 저녁을 만날 수 있다.

이날 대장간 소리는 그칠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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