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이야기 탐방대]<우해이어보>의 산실 마산 진동 앞바다를 돌아보고

희미한 새벽. 푸르스름한 기운은 아직 가시지 않았고, 무겁고 차가운 공기가 내 뺨을 스친다. 저 편 수평선 위에는 희연 안개가 서려 있고, 적막한 가운데 숨을 들이쉬니 온통 사방을 뒤덮은 푸름이 흡수되어 나도 푸름이 된다.

닭이 울기 시작한다. 천하를 가르는 우렁찬 소리. 곧이어 재채기 소리, 잠투정 부리는 소리, 뒤척이는 소리. 온갖 소리들이 섞여 새벽을 어지럽힌다. 이제 하루가 시작된다.

이 곳에 온 지도 어연 6년. 조정은 아직도 조용한 날이 없다. 멀디 먼 이곳에서도 어렴풋이 그들이 온갖 교묘한 책략을 꾀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니. 권력 다툼이 무슨 소용이 있으리. 권력과 명예, 부. 좇아 보았자 다 허황된 것인 것을. 그저 인간은 자연에게서 태어난 것. 그 속에서 본분을 찾아 성실히 사는 것이 오롯이 내가 할 일이다.

그래도 세속의 물이 꾸중물만은 아니었나 보더라. 엊그제는 옆집 만식이가 얼굴 붉히며 찾아와서는 영지에게 줄 편서 하나 적어달라 하더니. 이 곳 사람들의 마음은 모두 온순하고 그릇됨이 없다. 그래서 조정에서와는 달리 살아남기 위해 머리를 굴릴 일도, 교묘한 책략을 꾸며낼 일도, 거짓을 진심으로 위장하여 드러낼 일도, 없다. 그들이 먼저 진심으로 다가와 주기 때문에, 나도 온전히 내 진심을 다하여 그들을 대할 수 있다. 종종 그들이 가지고 온 각종 문서의 내용을 알려줄 때, 막막한 그 얼굴에 내용을 알려주어 그들이 고마워 할 때면, 그 어느 때보다도 자연스레, 온전히, 보람차고 기쁜 마음이 든다. 이 마을 속에서 글을 아는 사람으로서 이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면 세속에서의 생활이 그리 부질없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부령에 있다가 처음 이리 왔을 때, 터놓고 말하자면 아주 아득했다. 돈, 집, 의복, 식량, 어느 하나 제대로 갖추어진 것이 없는 채로, 혈혈단신으로 도착했으니. 그렇게 정처 없이 하룻밤 신세질 곳을 돌아다니던 도중, 열 살 남짓한 어린 아이가 도와주겠다며 나를 부르고는 어딘가로 향했다. 아이를 따라가다 보니 평범한 초가가 한 채 나왔고, 그 곳에는 한 노인이 집을 지키고 있었다. 아이의 할아버지 즈음 되는 듯 보였다. 아이가 노인을 향하여 무어라 말을 하였고, 그는 사람 좋은 웃음을 보이더니 하룻밤 묵으라고 하였다. 그날 밤, 나는 노인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날 이후로 나는 이 집에 세 들어 살게 되었다.

갑자기 노인이 내 이름을 크게 부른다. 여기선 양반 대접이라는 것이 없다. 사람은 본디 평등한 것, 우열을 나누어 보았자 다 허황된 것일 뿐이고. 본디 사람은 다 똑같거늘. 나도 함께 큰 소리로 대답을 하니, 곧 주인집네 배가 출항을 한다고 한다. 그 소리를 듣고 배 근처로 다가가니, 주인은 한창 어망을 정리하고 바다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당연한 듯이 그의 옆에 앉았다. 근래 들어 적적한 생활을 달래고 무엇이라도 남겨보고자, 어보를 작성하는 중이다. 하나하나 잡히는 물고기들마다 기록하고 확인하는 일은 그 무엇보다 재미가 쏠쏠하다. 무엇 대단한 것은 전혀 아니다. 다만 후세에 누군가가 소소한 이야깃거리로 삼아 준다면 그것 만으로 충분하다.

본격적으로 노를 젓기 시작했다. 새벽의 적막을 뚫으며 찰박거리는 물의 맑은 소리가 내 귓가를 스친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주변이 온통 안개로 덮인 아득한 바다의 중앙에서, 우리는 본격적으로 낚시질을 시작했다. 육지에는 갖은 동물들이 있고, 바다 역시 갖은 물고기들이 있다. 왜 이 사실을 여태껏 몰랐을까. 나를 다시금 깨우치게 하려 하는 것인지, 마침 바다 밑에는 희끗희끗한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몰려다닌다. 그 때였다. 주인의 낚시 바늘이 움직였고, 그가 낚싯대를 들어올리자, 펄떡펄떡 정제되지 않은 격동적인 몸부림이 배 안을 가득 채운다. 그의 말에 따르면, 공치라는 물고기라고 한다. 공치라…… 처음 들어보는 물고기이다. 이따 집에 당도하거든 좀 더 세밀히 살펴본 후에 어보에 남겨야겠다.

오늘은 비교적 일찍 낚시가 끝났다. 수확이 좋아서인지, 노인의 얼굴에 한가득 맑은 웃음이 서린다. 먼저 내려 노인이 따라 걸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항구 근처의 대숲을 배경으로 공치를 어깨에 메고 걸어오는 노인의 발걸음이 유난히 가볍다. 나중에 어보 속 공치에 관한 내용을 기록할 때 우산잡곡으로 시를 한 수 지어 기록해야겠다, 싶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서산에 걸리었다. 비는 부슬부슬 내리고, 공허한 공기가 내 마음을 스친다. 간만에 관기나 불러 볼까. 봉선이는 지난번에 마음에 품은 사내에게 서찰을 건네 보았다 하였는데, 그녀가 관기라는 이유만으로 단번에 거절당했다 하였다. 때문에 시름이 클 터인데, 오늘 불러 이야기를 들어보아야겠다. 문득 그 생각이 들자, 나는 곧장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때마침 가는 길에 미숙이와 민정이도 마주쳐, 모두 함께 불러 함께 술잔을 기울이기로 하였다. 그녀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절로 가슴이 미어진다. 가련한 처지에 있는 계집들. 본디 사람은 모두 평등하거늘, 스스로는 잘못한 것 하나 없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 곳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하등 대우를 받아야 하는 것인지…….

밤이 깊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즐거움 뒤의 공허함은 유난히 더 크게 느껴지는 법, 어스름한 달빛이 비추는 길은 쓸쓸하기만 하다. 집에 당도하거든, 미처 마무리하지 못한 어보를 마무리하고 잠자리에 들어야겠다. 공치에 관한 내용을 기록해야지. 낮에 보았단 주인의 모습을 남겨두는 것도 잊지 않아야겠다. 지금의 정서라면 우산잡곡 다섯 편 정도도 적당하다 싶건만, 하하.

닭이 다시 우렁찬 목소리를 뽐내기 시작한다. 어젯밤 늦게 잠자리에 든 탓인지, 평소보다 늦게 떠진 눈꺼풀이 천근만근이다. 주인 아들은 어디 갔을까. 이른 나이임에도 종종 다른 지역을 방랑하며 집에 돌아오지 않는 때가 많다. 오늘도 마찬가지인 듯 싶다.

느긋하게 조반을 든 후 어제 잠자리에 들기 전에 기록하였던 어보를 다시 펼쳐 검토하였다. 틀린 곳은 없는지, 이상한 부분은 없는지, 읽고 읽어본다. 한창 읽고 수정하기를 반복하고 있는데, 밖에서 누군가가 나를 부른다. 영지이다. 만식이에게 받은 서찰을 들고 와서는 나에게 무슨 뜻이냐 알려 달라 한다. 나에게 서찰을 건네는 영지의 얼굴을 보아하니, 입가에 힘을 주고 있지만 이미 서려져 있는 미소는 감추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안색도 화사한 것이, 이 아이 역시 만식에게 마음이 있구나, 싶다. 한창일 나이. 절로 입가에 미소가 드리운다. 내가 대신 써 주었던 서찰, 다시 읽어 그 내용을 말해 주니, 영지의 얼굴이 붉어지며 감사하다는 말을 짧게 전하고는 문 밖으로 쪼르르 달려나간다.

점심 때가 되었다. 역시 느긋이 식사를 마치고 마루에 걸터앉아 하늘을 보았다. 왠지, 홀로 앉아 낚시를 하고 싶은 기분이다. 단풍도 점점 물들어 붉게, 또 누렇게 색을 뽐내고 있는 자태가 예사롭지 않은 것이, 고저암에 간다면 더 화려한 모습들을 볼 수 있을 듯 하다.

낚싯대와 미끼를 간단하게 챙기고 고저암으로 향한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나뭇잎들은 예상했던 바와 같이 온갖 다채로운 색으로 울긋불긋 영롱한 빛깔을 띠며 나를 맞이한다. 바다 역시 단풍의 그림자를 한껏 안은 채 환한 모습으로 나를 맞이하는데, 그 모습이 과연 장관이다.

언젠가부터 익숙해진 손길로 미끼를 낚시 바늘에 끼우고 낚싯대를 짙푸른 바다로 내던진다. 그리고는 이내 고요가 찾아온다. 마음 속의 평안도 함께 찾아온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낚싯대를 통해 무언가가 느껴진다. 아아, 보통이 아닌 녀석인가보다. 힘을 쓸 요량으로 두 손 힘껏 낚싯대를 잡고 세차게 들어올린다.

감성돔이다. 그것도 꽤 큰 녀석이다. 절로 입가에 웃음이 번진다. 월척이다. 이 녀석을 집까지 어떻게 들고 가야 하나. 유별나게도 이 녀석은 등지느러미가 칼날과 같아 잘못 잡으면 손이 베일 수 있다. 조심조심 잡아들고, 바다를 적시기 시작하는 석양을 등 뒤에 둔다. 집에 당도하거든 어보에 감성돔도 기록하여야겠다.

이 말하자면 나는 이 곳으로 지금 유배를 온 상황이다. 하지만 그리 각박하지는 않다. 종종 이리 나와 물고기도 잡고,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진심을 나누며, 신분의 질서를 구태여 엄격하게 따르지 않고, 모두가 서로를 평등히 생각하는 이 곳이, 진정한 이상적인 곳이 아닐까. 나는 오늘도 기쁨과, 한편으로는 적적함을, 또 한편으로는 고독감을 가지고 집으로 향한다.

2015년 11월 <우해이어보>의 산실 마산 진동 앞바다를 돌아보고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